우리는 성령님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아니 우리는 성령님에 의해서만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령님을 잘 알지 못한다.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는 삶을 잘 살지 못한다. 개인적인 삶에서 뿐 아니라, 전체적인 기독교 공동체로 보아도 혼란스럽다. 넘어지고, 웃고, 울부짖는 등의 현상을 어떤 이들은 성령님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현상을 일컬어 어떤 사람은 “성령님을 학대”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이런 상황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는 것은 무척 흥미로왔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제임스 패커가 취하는 태도는 배울만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패커는 성경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령님의 역사를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을 분명히 한다. 그렇지만 현실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성령님의 명백한 역사에 대해서도 인정한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성경적인 용어로 재 신학화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노력의 결정체가 6장에서 드러난다. 이 패커의 이런 노력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공감하기도 하고, 비판적으로 보기도 하겠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읽을 수 있다. 1.2장에서는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기초를 놓고 있다. 3,4장에서는 성결의 문제를 다룬다. 5,6장에서는 은사운동 혹은 회복주의 운동에 대해서 다룬다. 7장은 패커의 표현처럼 디저트이다. 그러나 이 장에서 우리는 풍성한 기도의 제목들을 얻게 된다. 이 책을 통해 개인적으로는 성령과 보조를 맞추며 사는 삶에 확신과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1장에서는 성령님에게 바른 초점을 맞추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성령 자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이 더욱 분명해지면 성령의 역사를 훨씬 더 많이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릇된 함정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마음에서 현대에 많이 논의되고,추구하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서 말한다. 성령님의 역사 안에 능력, 은사, 통찰력등이 주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이런 능력과 은사와 통찰력을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을 가지고 있다. 능력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은사를 성령의 열매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 하는것, 또는 성경을 넘어서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패커는 이런 강조점들에 대해서 인정하면서도 오류와 함정들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그러면서 패커는 오늘날 성령의 역사의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무엇이 다양한 사역 중에서 중추적이고 핵심적인 요소인가? 대답은 임재의 차원에서 초점을 맞추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 안에서와 그리스도인에게 교회안에서와 교회에게 부활하시고 왕노릇하시는 역사적인 예수 믿음의 그리스도 우리 구주의 인격적인 임재를 알리신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일하시는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가 사랑받게 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게 하시며, 찬양받게 하시기 위함이다.
성령님을 추구하면서도, 정확한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죄성에 의해서 성령님의 역사가 왜곡되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자신들에게 주시는 일반적인 경험에 대해서 무시하거나 시시하게 생각한다.(아마 여기에 속하는 것이 임재에 대한 약속과 성취일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뭔가 독특한 체험을 중시한다. 성령님의 역사를 독특한 체험에서만 찾으려고 한다. 이런 것은 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경의 약속을 넘어서면서까지 자신을 만족시켜 줄 역사를 구하는 인간의 죄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2장에서는 성경 속에 나타나는 성령님의 핵심적인 사역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중재하는 일임을 증명하고 있다. 패커가 말하는 임재는 ‘어떤 공간적인 임재를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관계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을 세 가지로 다시 설명한다. 첫째는 성경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가까이 오셔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의식, 곧 그분이 여기 계시다고 하는 의식이다. 둘째는 그분이 활동하고 계시다는 의식이다. 셋째는 그가 하시는 일 자체에서와 같이 스스로 영화로우시다는 의식이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은 행동하는 능력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보혜사로서의 성령님의 역할에서 우리는 성령님의 인격성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향한, 위한 사역이다. 성령님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인간중심적으로 흐르게 되면, 성령님을 놓치게 된다. 이렇게 중심을 잡은 다음에 패커는 성령의 기름부음과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논의 한다.
2장의 논의에서 참 도움을 받은 관점중에 하나가 ‘성령의 회심’케 하는 사역이다. 고든 D.피는 그의 책 에서 회심은 들어가기와 머뭄 두 가지를 모두 말한다고 한다. 패커도 ‘과거에 그 사람이 회심하였음을 증거하는 오직 유일한 증거는 지금 그 사람이 회심한 모습으로 보이느냐에 있음을 강조 해 줌으로써 잘못을 교정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현재에 중요한 관점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에 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간다. 그리스도인다운 면모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과거 언젠가의 고백을 무기로 삼는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회심한 사람은 현재의 삶에서 회심의 증거를 보이며 살아야 한다. 현재에도 성령님의 역사를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님의 은사 뿐 아니라,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열매가 풍성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성령님과 함께 걷는 길은 신비로운 체험의 길이기 보다는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과 동일한 성질의 길로 가야 한다. 죽음을 거쳐 부활에 이르는 길이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본질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것인데, 현재의 우리 교회는 이런 면들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
2장에서 성령의 은사를 다루면서 성령의 은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이런 은사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천년 이상의 성직자주의의 올무를 벗고, 평신도 사역을 보편화시키는 데로 옮겨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우리 교회에서는 아직도 낯설다. 우리 교회에서도 은사에 대한 보편적인 강조가 있지만 성직자주의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평신도 사역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이 보편화된 교회는 소수에 불구하다. 서구에서는 평신도라는 말이 잘못된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지만, 우리 교회는 아직도 성직자주의가 가득하다. 이런 성직자주의로 인해 교회가 점점 더 황폐해져 가고 있다. 이런 황폐함과 빈곤함을 면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은사에 대해서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패커는 오순절의 진수를 성령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측면에서 말한다. 물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역사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오순절날 임하신 성령의 새로운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령님을 모신 신자들속에 예수님이 살게 하신다. 이런 놀라운 역사를 신학적으로 정리해서 보여주지 않는다는 면에서 실망스럽다. 성령님의 새로운 역사의 가장 놀라운 역사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안에 모시고 산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며, 핵심이다. 여기서부터 은사도, 열매도, 사역도, 성결도 시작되고,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3,4장에서는 성결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3장에서 먼저 성결의 잘못된 모습으로, 자기 중심의 경건과 행동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이런 문제가 발생한 이유를 말한다. 그런 다음에 성결에 대한 성경적인 기본요점들을 말한다. ① 성결의 본질은 드림을 통한 변화이다. ② 성결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칭의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③ 성결의 뿌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과 다시 그와 함께 살리심이다. ④ 성결을 수행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⑤ 성결의 체험은 갈등의 체험이다. ⑥ 성경의 법은 하나님의 계시된 율법이다. ⑦ 거룩의 핵심은 사랑의 심정이다. 이런 기본적인 관점에서 성결의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4장에서는 성결을 둘러싸고 교회사에서 나타났던 대표적인 세 가지 관점을 다루고 있다. 어거스틴 주의의 근본원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예배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에 대하여 이룩한 모든 일을 우리 안에서 행하시고 행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어거스틴주의는 의도적인 겸손, 명석한 통찰력과 최선의 권고의 열매인 지혜의 인도함을 받아서 전심전력의 활동이 있어야 하고, 영적변화의 참모습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어거스틴주의를 기준으로 웨슬리의 완전주의에 대해서 다룬다. 패커는 웨슬리의 완전주의를 어거스틴의 교리를 버린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늘린 것이라고 본다.(물론 이런 관점은 성결의 교리에 한해서만이다. 웨슬리의 알미니안니즘은 어거스틴의 교리를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안들은 이 완전주의와 알미니안적 경향을 결합하면서 제2의 축복이라는 교리로 나갔다. 웨스리의 완전 개념은 오해를 많이 받고 있다. 패커는 ‘어떤 무죄 상태의 아담이나 천사같은 무죄성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인간의 창조도 되고 구속의 목표가 되기도 하였던 이른바 전심전력 결연한 태도의 경건상태로 나아가고, 그런 다음에는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패커는 성결에 대한 이런 견해를 완전이라 부른 것이 잘못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전적 사랑의 분여나 전적사랑이라고 불렀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교리가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패커는 퀘직의 성결개념을 다룬다. 케직에서는 ’더 고차원적인 삶‘ ’가장 높은 차원의 삶‘으로 들어가기 위한 공식을 끌어낸다. 케직에서는 여전히 그 전과 같이 죄악이 자기들 안에 남아 있지만 그 고차원적인 삶으로 들어가면 악한 소유의 끄는 힘과 도덕적인 연약이 효과적으로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교훈들이 실제적인 도움들을 줄 수는 있지만 성경적인 가르침을 넘어가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패커는 성결에 대한 세 가지의 결론을 제시한다. 역사적인 결론으로 ’웨슬레나 케직의 성결교훈들이 영향력 있었던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갈망하는 바를 제시하는 교훈들이었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는 성경은 웨슬레와 케직파의 관점보다 어거스틴주의를 지원한다는 것이다. 경건한 헌신의 입장에서 내리는 결론은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같이 되게 하여 달라는 간구를 하나님께 드릴 때, 그것을 구하는 그 사람들의 신학적인 관점이 아무리 부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구한대로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성령님의 역사를 구하라는 것을 말한다.
패커의 논쟁은 공정하다는 면에서 본받을 만 하다. 패커는 이 논쟁을 시작하기 전에 창조적인 논쟁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그런 다음에 최대한 그런 원칙을 지키고 있다. 논쟁은 없고 적들에 대한 성토만이 가득한 이 나라에서 본 받아야 할 관점이며, 태도이다. 특히 신학적 논쟁을 보기 힘든 우리에게는 정말 중요한 태도이다. 특히 웨슬리의 관점을 매도하지 않고, 공정하게 다루고, 평가한 것은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절충적이거나 허용적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기만 하면 어떤 추구도 가능한가? 사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다는 말을 하나님의 수식어로 달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이런 면에서 패커는 공정하기는 하지만 명확하지는 못하다. 아마 이런 태도가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이 처한 딜레마이며 위기인지 모른다. 쉐퍼는 그의 책에서 이런 복음주의의 허용주의가 복음주의를 위기에 처하게 한다고 말한다. 모든 이론들 속에 하나님의 이론들이 조금은 숨어 있으므로 그것을 찾아 내어야 한다는 생각은 소중하지만, 이것이 자칫하면 모든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흘러가기 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고신의 신학에서는 이런 관점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것 외에는 모두 틀리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이 우리의 신학풍토이다. 신학의 순수성을 강조할수록 다른 신학적 경향들을 짤라 내기 바쁘다. 우리가 이런 우를 범하지 않도록 늘 우리 자신의 태도를 점검해 보아야 하겠다.
5,6장에서는 은사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패커가 다루는 은사주의가 어떤 부류의 운동을 말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국이라는 상황 속에서 어떤 운동을 말하는지가 명확하지 않는 것이다. 분명히 오순절 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순복음 교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6장에 가서는 이런 운동을 “회복주의”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이런 운동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는 좁은 소견으로는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가면서 생각한 것은 이런 은사주의를 중심에 두는 운동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모든 교회에서 은사주의의 강조점들이 부분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이 우리 교회의 특징인 것 같다. 다양한 운동의 강조점과 적용점들이 맥락도 없이, 신학적 반성도 없이 교회 현장에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신학적으로 반성해 보는 일이 힘든 것 같다.
은사 운동의 특징과 장점은 생생함과 살아있음이다. 체험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인들을 살아있게 한다. 그러나 은사운동은 교만하게 한다. 그리고 감정은 중시하고 지성은 무시하게 한다. 이런 현상들이 최근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나타난다. 찬양 집회를 중심으로 체험과 은사에 대한 강조가 많다. 이런 집회를 통해 젊은이들은 내적 치유를 경험하고, 방언을 경험하고, 영적인 능력을 경험한다. 그러나 가슴이 뜨거워질수록 머리는 비어간다. 더 큰 문제는 일상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삶을 끌어안고, 고뇌하고,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하는 영성이 사라졌다. 오직 그 집회를 통해서만 생생함을 느끼고, 충전될 뿐이다. 마치 집회에 중독 된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반지성적인 현상은 심각하다. 책을 읽지 않고, 책을 통해서 도움을 받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은 심각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근원중의 하나가 바로 은사운동에 있다는 패커의 통찰력이 참 도움이 많이 되었다.
6장에서 패커는 은사운동을 재 신학화 한다. 분명하게 체험되는 현상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을 하나님의 역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사단의 장난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패커는 먼저 회복주의자들의 견해를 성경으로 시험한다. 성령세례, 방언,방언의 해석, 신유, 예언등의 은사를 신약시대의 회복으로 보는 견해가 성경적으로 확증적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 이러한 것들을 증거로 삼아 신학의 원형적인 실체들이 중단되었다가 이제 다시 그 초대 교회의 상태대로 복원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체험의 현상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패커는 다른 신학적 대안들을 제시한다. 패커의 결론은 한마디로 성경적인 증거는 없지만 이런 경험들이 영적으로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체험들을 무시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토론해 보아야 한다. 결론과 같은 태도는 패커가 계속해서 취해 온 것이다. 이런 태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느끼는 것을 보았다. 성령의 실제적인 체험을 하고서 고신에서 신학을 하면서 답답해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여기에 계속 있는 것이 합당한지를 의심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을 보았다. 그런 체험이 성령님의 역사임이 분명하니까. 이런 현상을 보면서 우리의 신학이 너무 닫혀 있는 것이 아닌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떤 분이 열린 보수라는 말을 썼다. 이것은 참 어려운 일이지만 적절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열린 보수의 태도를 가지고 신학을 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목회의 현장에서는 이런 열린 보수의 태도가 중요한 것 같다.
우리는 7장의 제목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성령님의 역사를 늘 간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성령님 임하셔서, 우리로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게 하소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령님 임하셔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시고 살게 하소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며, 그리스도처럼 살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오직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성령님 임하셔서. 우리의 교회를 새롭게 하여 주소서.메마르고 황폐해지고, 무너진 곳을 보수하여 주소서. 당신의 사람들을 통하여 교회가 살아있게 하소서. 생명의 열매들을 보이게 하소서.
성령님 임하셔서. 부흥의 날을 주소서. 삼위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사는 우리 되게 하소서.
우리의 전 인격이 성령님으로 지배되기를 소망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