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한번이라도 진공 상태에서 성경을 읽은 적이 있는가?
성경 메시지를 흐리게 하거나 뒤트는 역사적, 언어적, 문화적 영향에서 해석학적으로 완전히 차단된 진공상태에서 성경을 읽은 적이 있는가?
신약 성경을 인간이 이전에 본적이 없었던 것처럼 열라는 알렉산더 켐벨의 충고를 따를 수 있는가? 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선호할 만한 것인가? 성경 읽기를 배운, 해석의 문화와 공동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가? 정말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관찰자와 해석자가 있겠는가? 우리는 이를 의문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객관적이고 매우 개인주의적인 해석입장과 방법을 칭찬할 만한 목표로 삼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본능적으로 전제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성경해석은 교부들이 주장하듯이 교회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성경해석은 기도와 예배라는 맥락에서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해 행하는 활동이다.
사사롭거나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활동이다.
교부들의 성경해석의 본질은 교회와 공동체 헌신과 연결되어 있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구호는 앤서니 레인의 표현처럼 "교회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교회가 성경에 대해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교부들 스스로가 그렇게 주장한 바이다. 동시에 "오직 성경으로"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원천이 성경과 성령이라는 뜻은 아니다.
종교개혁 시대보다 계몽주의 시대에서 자율적 해석가라는 이상이 보다 쉽게 통용될 수 있었다. 루터와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지혜롭게도 역사와 공의회, 신조와 교부의 글을 포함한 교회전통을 풍부한 내용이 담긴 원천으로 여겼다. 어리석은 자나 거만한 자만이 그러한 것을 무시할 뿐이다.
가장 지혜로운 기독교 사상가는 자신들이 전통을 보존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전통은 성경에 근거를 두며, 비판적으로 검증되며, 수많은 남녀 노소의 삶을 통해 검토되며, 비판자들에 맞서 옹호되며, 수많은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서 다듬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