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계신 하나님은 선교하는 하나님이시다.’ 이 선언은 중대한 선택을 요구한다.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아야, 믿음에 대한 온전한 삶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면서 선교사로서 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거짓인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삶에서나 사역에서 모든 것은 선교적인 삶을 지향해야 한다. 선교의 삶을 지향하지 않는 사역은 믿음의 고백으로서의 사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행동과 구원역사는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목적의 한 과정에 참여했다. 세계의 구원을 위한 그 계획에 우리는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는 자주 이런 목적을 잊어버린다. 우리 구원의 목적을 잊지 않는 사역을 해야겠다. 성경공부와 설교 등을 통해 우리가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요나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요나서 저자가 보듯이 이스라엘은 자기 일에 너무 골몰하게 된 나머지, 더 이상 세상으로 눈을 돌려 열방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받았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해방의 메시지를 말해주기 위해 이방지역에 발을 들어놓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불순종한 요나는 그 폭풍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 채 배 밑바닥에서 잠을 잔다. 교회 역시 하나님의 심판의 폭풍이 온 세계를 휩쓰는 한복판에서, 바깥의 바람이 자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확신하면서 무관심한 채 잠자고 있는 경우가 많다.’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외양만 종교적으로 꾸미고 잠들어 버린 교회. 잠들어 버린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나를 주님은 다시 일깨운다. 요나 같은 폭풍과 물속에서의 거의 죽을 뻔한 경험, 물고기 뱃속에서의 죽음 등을 경험케 하시지 않고도 깨워주신다. 이 은혜를 감사하며 속히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사람들에게 선교에 참여하라고 호소할 때 제일 먼저 강조해야 할 것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슬픈 소식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업에 대한 의무감, 책임감, 부담감 때문에 선교를 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동기로 교회가 선교사역에 헌신하면 점점 더 지치게 될 뿐이다. 점 점 그 문제들만 크게 보이다가 결국에는 의기소침해 지거나 불가능한 일에 도전한 듯해서 무기력하게 느끼게 된다. “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많은 선교사역의 약점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그리스도가 이미 하신 일 보다 더 크다는 의식을 우리가 무심코 나타낸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장 심각한 필요라 해도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보다는 못하다.”이 말은 가슴을 뛰게 한다. ‘선교는 삼위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행동에 참여하는 특권이다. 선교사역이란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나라를 구하며, 그 나라의 임함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선교사역은 완전히 이루어질 그 나라를 소망하며 싸우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러한 총체적 비전이 없다면, 선교에 관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프로그램들과 야망들과 욕구들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되어 버릴 수 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의 목표가 될 때, 이러저러한 요구들 및 상충되는 야망들은 왕이신 하나님의 진군 명령 소리 아래 사라져 버린다. 선교에 종사하는 것은 왕이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어떤 선교단체의 선교훈련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처음에 의아했던 것은 그 선교단체가 사람들을 선교에 동원하면서 예배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예배를 통한 선교사역의 동원을 하나의 사역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는 의아해 했다. 그리고 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보다, 예배의 회복을 더 말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2과의 글들을 읽으면서 나의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우리는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스도를 찬양하도록 공동의 열정을 가지고 협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스티븐 호돈은 세 가지 실제적인 제안을 한다. 1. 우리의 동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는 것으로 심화시켜라. 2. 선교 과업을 하나님의 영광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규정하라.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력을 통합하라.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수많은 논쟁들과 사역에 있어서의 긴장을 사라지게 된다. 선교단체나 선교사들 간의 경쟁, 복음전도와 사회활동이라는 불필요한 이분법적 접근등이 치유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를 주라 부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좀더 온전히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리라는 것을 너무나 확실히 믿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에 조금도 연연 해 하지 않고 죽음의 위협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종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나라가 하늘에 임한 것처럼 땅에도 임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며 일한다. 이같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모든 참된 소망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기도의 정수이다. 하나님 나라야 말로 모든 선교의 핵이다.’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끔씩 하나님나라에 대한 강의를 했다. 그러나 그 강의의 목적과 지향이 선교이지는 못했다. 물론 선교적인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 했지만,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선교사적인 삶에 동참하도록 적용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나의 좁은 시각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임하심을 말하면서도 온 세계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나라의 표적들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세계적인 필요와 거기에 임하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르치지 못했다. 나의 좁은 시각이 결국 배우는 학생들의 눈마저 막아버린 것이다. 이것은 사역자로서의 심각한 죄다.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할 사역자가 하나님을 가로막고 있었으니. 주여 나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그리고 주여 나의 눈을 열어주소서. 예수님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단순하지만 핵심적인 말을 하셨다. 그의 나라를 구하며 사는 삶의 핵심은 기도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웰즈는 기도는 현상에 대한 반역이라고 말한다. 참 명쾌하고 힘 있는 정의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의 기도의 잘못된 부분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기도의 본질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기도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가 없으면 끈기 있게 기도할 수 없다. ‘기도의 본질은 무엇인가 ? 그것은 본질적으로 반역이다. 타락한 세상에 대한 반항, 완전히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절대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거부하는 것이다. ’‘간청하는 기도는 다음 두 가지 믿음이 있는 곳에서만 활발하게 드려질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 불규칙하게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 나라는 임하는 적이 없으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너무 드물다. 둘째로,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을 바꿀 수 있으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청하는 기도는 한편으로 우리가 직면하는 삶이 다른 식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다른 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소망의 표현이다.’이런 면에서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면서도 사단과의 전쟁의 시간이다. 그러나 나의 기도는 얼마나 피상적이었던지 해보고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만 이라는 태도로 기도했다. 이 장을 읽으면서는 계속 회개하였다. 선교에 대해서 너무 피상적이고, 강하게 기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리고 나의 삶과 사역의 기초를 다시 놓게 만들어 주었다.
현대 신약 신학에서의 하나의 경향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서의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을 나누어서 보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의 결과는 예수님(더 넓게는 복음서- 특히 마태-까지)은 이방인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든 것은 바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4장은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서, 예수님의 계획,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명령까지 모두 이방인을 향해 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예수님을 이방인들과 분리할 수 있단 말인가 ? 또 하나 현대신학의 경향은 만민 구원설에 대한 주장과 다원주의적인 성격이다. 이에 대해서 4과에서는 ‘잃어버려짐’ ‘그리스도의 유일성’이라는 장에서 반박한다. 그리고 이 두 장은 현대 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욱 힘써 선교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입으로는 유일하신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삶으로는 보편주의자들처럼 살며, 다원주의자들처럼 산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열방을 향한 열심과 계획이 없다면, 유일한 구원자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그것은 그 고백이 얼마나 허탄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교를 막고 있는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심각한 것 중에 하나가 교회론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랄프 윈터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구속적 선교의 두 구조’로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 혹시 이론적으로 머리로 동의하지만 실제적인 교회의 모습에서 이런 구조에 대한 이해와 헌신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가 ?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끊임없이 모달리티를 세우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모달리티의 크기로 교회의 크기를 재고, 그것으로 성공의 여부를 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그 구속사역을 얼마나 잘 감당하느냐가 교회의 성공여부를 재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구속사역을 효과적으로 담당하는 구조를 가진 교회가 큰 교회인 것이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교회를 세워나가야 하겠다.
하나님은 은혜로 나를 구원하셨다. 그리고 처음에는 캠퍼스 선교단체에서 캠퍼스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게 하셨다. 그리고 점점 나의 눈을 넓혀 오셨다.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눈과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하셨다. 최근에는 내 주변에서 단기 선교사로 헌신하는 사람들을 주셨다. 대학 와서 영접한 한 자매가 터키로 단기선교를 떠나고, 모든 어려운 과정을 마치고 개업의가 될 수 있는 시기에 개업을 예멘에서 하게 된 후배 등. 그러나 또한 문제의식도 있었다. 중국에 선교 갔던 한 자매는 너무나 힘들어 현지인과 결혼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간접적으로 겪으면서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도 선교에 대한 마음들을 자연스럽게 주셨다. 아이들은 선교사로 가는 사람, 가 있는 사람, 갔다 온 사람들을 만나면서 선교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되었고, 우리 부부도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선교지로 갈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 가운데 이번에 읽은 이 책은 선교에 대해서 성격적으로 더 분명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성경을 읽는 것,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반드시 선교로 적용될 수밖에 없음을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또 하나 이 책은 내가 선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나는 지금도 전투의 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 특히 기도하는 그 시간에 나는 전투의 현장에 서서 영적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나의 기도로 살아가는 많은 선교사들을 기억하면서 바울이 기도하는 것처럼 기도해야 하겠다. 또한 바울이 부탁하는 기도제목을 들고 기도하는 선교사로 살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