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흥에 대한 세가지 견해
2. 찰스 피니와 에드워즈의 부흥신학 : 무엇이 올바른가?
- 성경적, 역사적 고찰
3. 에드워즈의 부흥신학을 통해서 본 한국교회의 부흥신학
- 전 병욱의 부흥신학
- 셀의 부흥신학
- 부흥현상에 대한 고찰
4. 부흥신학 고찰을 통해 배운 교훈
에드워즈가 쓴 부흥에 대한 글들은 부흥신학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에드워즈는 당시에 일어나고 있던 부흥을 변호하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변호가 아니라 성경의 표준을 가지고 당시의 현상을 분별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에드워즈의 글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제공한다. 이런 분별력은 확고한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글들에는 그 이면에 흐르는 부흥에 대한 일관된 신학이 있다. 이 글에서 그런 에드워즈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왜 성경적인 견해에 가까운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후에 에드워즈의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한국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부흥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안 머레이는 그의 책에서 부흥에 대한 세 가지 견해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견해는 ‘부흥의 단회성’을 주장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의 기초는 우리시대가 오순절과 동일한 시대이며, 이미 성령이 임했으므로 또 다른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와 계신 성령을 찾아야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결과로 성령의 특별한 역사인 부흥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 견해는 ‘부흥은 사람의 노력에 의해 반복될 수 있다’는 견해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행하기만 하면 부흥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는 책임은 교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생각 안에서 어떤 사람은 기도와 전도를 강조한다. 또 어떤 사람은 회개와 갱신된 개인의 거룩함을 강조한다. 이런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구절이 역대하 7장14절이다. 세 번째 견해는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셨고 그 동일한 성령이 지금도 일하심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령의 부으심의 정도가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성령의 역사에 일반적인 것과 특별한 것이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항상 일반적인 사역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헌신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특별한 은혜를 주시는 때가 있다, 이런 특별한 때를 흔히 부흥의 때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부흥의 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견해 중에 첫 번째 견해는 매우 소수의 견해이거나 거의 주장되지 않는다. 또 부흥이 일어날 수 없다는 사람들도 가끔은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부흥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흥에 대한 논쟁은 두 가지 견해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 두 견해는 모두 부흥을 간절히 사모하지만 부흥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 두 견해의 대표자가 찰스 피니와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찰스 피니의 부흥신학은 매우 실용적이다. 그리고 그의 책 “진정한 부흥”은 뜨거움과 능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가 제안한 많은 부흥의 방법들이 지금도 교회에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찰스 피니의 부흥신학은 신학적으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존 엘리어스는 찰스 피니의 부흥신학에 대해서 “인간의 전적타락, 완고함, 영적 죽음의 상태와 오직 성령의 깨우치심과 이기게 하심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고 평가했다.
이런 부정을 통해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신학을 고찰하는 자리에 이르렀다. 에드워즈의 부흥신학이 무엇이며, 과연 그의 신학은 성경적인가? 에드워즈는 부흥이 “인간의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부흥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역이다. 그러므로 부흥은 엄청난 유익을 준다. “ (부흥의) 소나기의 단 한 방울만 있어도 가장 성공적인 혁명이 가져다 주는 모든 현세적 유익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행복, 더 큰 혜택을 인간에게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부흥에 반대하는 일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위험스러운 일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에드워즈는 부흥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인 증거를 제시한다.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요 부흥이라고 주장할 때 과연 그것이 진정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열광주의 결과인지를 판단하는 기준들을 제시한다. 에드워즈의 가장 큰 공헌 중에 하나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판단 기준들이 철저하게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판단 기준을 잘 정리해서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에드워즈는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임을 강조하면서도 목사들의 책임을 또한 강조한다. 부흥을 지원하고 진작시킬 일차적 책임이 목사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목사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기대하며 일어서 죄인들을 각성시키고, 회심시키는 일을 해야 하며, 성도들을 굳게 세우고 위로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칼빈주의의 신학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목사들의 책임은 사역자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을 다루면서도 드러나다. 부흥을 지지하고 부흥을 위해서 일하면서도 교만하거나 신비주의 광신주의 그리고 사단의 술수를 잘 몰라서 부흥의 방해가 될 수 있음을 경고 한다. 이런 모든 강조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부흥이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또한 인간의 책임이 있음도 인정한다. 이런 부흥신학은 교회사의 증거들과 일치한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책에서 역사 속에 있었던 많은 부흥의 역사들을 말하고 있다.그러면서 진정한 부흥은 주권적인 역사로 일어났음을 분명히 한다. ‘ 복음전도 캠페인은 밖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 어떠한 일을 하기로 교회가 결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부흥은 어떠한 일을 하기로 교회가 결정할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흥은 교회에게 행해지는 일이요, 교회를 향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흥이 어떤 의미에서 오순절날의 반복이’다. ‘부흥이란 땅 위에 임한 하늘의 날들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로이드 존스는 교회사를 통한 교훈에서 부흥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였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여기에서 거치지 않고, 사람들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 진리를 올바로 가르쳐야 함을 강조한다. 특히 하나님에 대한 교리와 인간에 대한 교리가 올바로 가르쳐져야 한다는점을 가장 먼저 강조한다. 그리고는 기도하는 일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부흥을 고대하는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있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찰스 피니가 에드워즈식의 부흥을 비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수동적으로 만든다는 비판은 올바르지 않다. 부흥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인정하면서, 인간의 책임, 특히 목사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긴장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경의 진리이며, 역사가 증거 하는 바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신학은 이처럼 성경과 역사의 터 위에 서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에드워즈의 부흥신학보다는 찰스 피니의 부흥신학이 더욱 잘 받아들여짐을 본다. 최근에 한국에서 일어나는 부흥신학들은 피니의 부흥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먼저는 현재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흥신학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한국에서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는 현상들을 에드워즈의 시금석을 통해 시험해 볼 것이다. 먼저 살펴볼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신학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전 병욱의 『부흥.com』과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셀의 『자연적 부흥』이다. 『부흥.com』는 겉모양은 에드워즈의 부흥신학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내용은 철저히 피니식의 부흥신학을 따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 책이 일관된 이론서가 아니라 틈틈이 쓴 에세이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아 주기에는 그 정도가 심하다. 이런 현상은 아무래도 신학 따로, 현장 따로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목회실천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며, 신학적 사고에 의해서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실용적인 세미나가 목회현장을 휩쓸고 있다. 어떤 교회가 한 방법을 써서 성장하면 곧 그 방법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많은 교회가 이 방법을 배워서 자신의 교회에 이식시킨다. 또 외국에서 새롭게 선보인 방법론에 대해서도 빨리 수입한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 목회관, 목회자의 사명등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거나, 적당히 타협적으로 생각한다. 이런 현상이 이 책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부흥에 대한 선언이나, 정의는 에드워즈 적이다. ‘부흥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부흥주의를 추종하지 말고 조용히 묵상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부흥은 인위적인 운동이 아니다.’ 이런 말들은 책의 각 부의 표지에 적힌 말들이다. 그러나 정작 내용에 들어가면 이런 주장이나, 선언들이 무색해 진다. 대표적으로 각 장의 제목들은 모두 “00 법칙”이라고 되어 있다. 이런 법칙을 지키면 부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 장을 읽어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피니의 부흥신학을 반복하는 것이다. “부흥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반복 된다.” 자신의 교회를 부흥한 교회로 규정하고, 자신이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끌어 왔다는 대목에서는 그가 생각하는 부흥이 ‘수평이동을 통한 교회성장’이상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런 행동을 그의 책에서는 ‘양 도둑질’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교회에서 일어난 일은 부흥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도 이해할 수 가 없다. 또 그가 들고 있는 대부분의 예들은 경영학적으로,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들고 있다. 그가 많은 독서를 한다는 것은 알려진 일이지만 이런 예를 통해 알게 되는 부흥은 경영학적인 성공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많은 청년회들이 양적인 성장으로서의 부흥과 세상에서의 성공으로서의 부흥을 갈망하게 된 것은 아닐까?
『자연적 부흥』은 철저하게 피니 식 부흥신학을 견지하고 있다. 이런 부흥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부흥의 공식이라는 것이다. 기도×열정×접촉+동화×셀=부흥이라는 것이 부흥의 공식이다. “기도에 지속적이며 강렬한 열정을 곱하고 또다시 교제의 빈도를 곱한 후에 셀의 숫자와 동화를 곱한 것을 더하면 부흥이 된다. 이 공식은 교회가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추종자들로 하여금 열정적이며 일평생 지속되는 전도를 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동원하며 개인적인 교제의 빈도를 증가시키고 동화의 과정을 최대화하며 셀 공동체 안에서 작용되도록 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부흥의 원리와 부흥의 전략을 다루고 있다. 이런 식의 부흥신학은 피니의 생각을 극단화 시킨 듯이 보인다. 더 큰 위험은 이런 생각의 출발점이다. 이 책은 부흥을 이야기 하지만 그 출발에 성경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출발점은 숫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들이며, 자연에서 나타나는 성장의 원리들이다. 이 두 원천을 관찰한 후에 전략을 형성하고 이 전략을 교회에 그대로 적용한다. 이런 적용이 실제로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정정도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부흥이 아니다. 이런 두 가지의 관찰만으로 한국교회의 부흥신학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부흥신학은 피니 식이다. 이런 피니의 영향을 볼 수 있는 현상을 머레이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피니의 견해를 따른다면 부흥의 성공여부는 어떤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수적 변화에 따라 판단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는 부흥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숫자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전도 집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피니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러한 의미의 변질을 부추겼던 것입니다.
한국에서 부흥이라는 용어가 숫적 성장으로 국한 되는 것은 바로 이런 피니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부흥의 현상에 대한 시험(test)이다. 부흥이란 불리는 현상을 시험하는데 에드워즈의 글들은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 준다. 머레이의 평가처럼 교회사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만큼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학자는 없을 것이다. 특히 『부흥을 원하면 고정관념을 버리라』라는 책에서는 참된 부흥의 현상과 부흥의 현상이 아닌 것을 구분하고 있다. 존 윔버가 주도했던 토론토 축복이 한국교회에 알려진 후부터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부흥이라고 불리는 현상들이 일어났다. 특별히 찬양집회를 중심으로 쓰러짐, 방언, 거룩한 웃음, 영적인 분별등 오순절 운동에서 강조하던 여러 육체적인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을 부흥의 현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남으로 우리는 지금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것인가? 에드워즈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 사람들이 육신에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등만으로 부흥이 나타났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역사라고 입증하는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1. 참되신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이 불타오를 때 2. 사단의 왕국이 공격당할 때 3.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더욱더 사모할 때 4. 사람들이 어리석음과 미혹에서 해방되어 진리로 인도될 때 5.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증대될 때. 젊은이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성령집회, 찬양집회, 은사 집회등이 이런 온전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지 못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을 부흥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흥신학의 고찰을 통해 배우는 교훈 중 하나는 부흥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정말 우리 일생의 한 순간이라도 이 영광스러운 일에 사로잡히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듯이 부흥을 열망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으며, 우리의 시대에 일어나지 않는 것 때문에 좌절하기 쉽다. 우리에게는 왜 그런 은혜를 주시지 않는가?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며 낙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흥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면서,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말씀에 순종하고,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며, 진리를 가르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흥을 소망하지만 부흥이라는 말에 쉽게 들떠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최선을 다해서 이루어야 겠다. 부흥 신학의 고찰을 통해 배우는 또 하나의 교훈은 신학의 중요성이다. 찰스 피니의 부흥신학의 문제는 그의 기본적인 신학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한국 교회가 이런 피니의 부흥신학의 영향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신학의 문제이다.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신학의 정립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설 수 있다. 신학을 무시하는 실용주의적 목회실천은 자칫하면 하나님 없는 목회, 더 나아가 우상숭배로 나아갈 위험이 있음을 본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과 말씀을 사용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위험 앞에서 남은 기간 건전한 신학을 정립하는 데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