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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와 기독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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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룩한나그네 2007. 5. 23.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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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F 『대학가』2006.6.4 박득훈(언덕교회 목사)

양극화 현상에 대한 기독청년의 대응

최근 5.31지방선거 결과를 평가하는 시각은 다양하다.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는 이번 지방선거는 시대정신의 교체를 시사한다고 보면서 국민적 거부 대상 중에 하나로 ‘반(反)자유주의적 결과평등주의’를 꼽았다. 한편 조선일보는 선거직후 사설에서 정권의 정치적 필요는 있을지 몰라도 국민들이 절실하다고 여기지 않는 사업 중 하나로 ‘양극화 해소라는 구두선(口頭禪)’을 들었다. 물론 구체적 실천방안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토를 달기는 했지만 양극화 해소 자체에 대한 무관심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에 김호기 교수의 지적처럼 진보진영에선 중도개혁세력을 표방하는 여당의 패인을 성장동력 확충과 양극화 해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데 실패한데서 찾는 경향성이 강하다. 국민은 여전히 양극화 해소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분석이다. 이런 맥락에서 박명림 교수는 ‘현 정권이 양극화 극복에 실패하면 부정적 유산을 남기고 물러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면서 ‘사회 양극화를 통해 건강한 시민계층이 붕괴하면 민주주의는 요동친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한겨레신문도 사설을 통해 진보개혁세력의 반성은 치열하고 엄격해야 하지만 ‘교육 복지 소득에서의 양극화 해소’에 대한 열망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기독청년은 이런 엇갈린 분석과 평가에 대하여 신앙적 시각에서 분명하게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기독청년들 역시 어쩔 수 없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이 일반사회 뿐 아니라 대학캠퍼스까지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순식간에 도태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압박감을 한시도 떨쳐버리기가 어렵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자기 앞도 가리기가 힘든 데 양극화 해소라는 큰 담론을 자신의 과제로 삼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기독청년이라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이 문제를 가슴에 떠 안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 양극화 현실을 먼저 간단히 살펴본 후, 기독인이 양극화 현상에 관심을 가져야할 신앙적 이유를 다루고, 양극화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모색한 다음, 마지막으로 양극화 해소를 위한 기독청년의 대응방안을 대략적으로나마 제시하려고 한다.

1. 양극화 현실

한국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급물쌀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왔기 때문에 갈수록 심화되는 다층적 양극화를 고통스럽게 경험하고 있다. 소득의 양극화는 건강과 교육의 양극화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계층별 양극화로 굳어져 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이념적 입장과 상관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 현실이다. 다만 보수진영은 양극화 현상은 일종의 필요악이니 더 이상 거론하지 말거나, 양극화라는 자극적인 말 대신 격차라는 보다 중립적인 말을 사용하자고 할 뿐이다.

우선 소득의 양극화 경향을 살펴보면 매우 심각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미곤․여유진 박사 팀은 경제성장의 몫이 빈곤층과 비빈곤층에게 얼마나 골고루 전해지는 지를 ‘경제성장의 몫 분해 모형’으로 분석한 결과를 지난(2006년) 4월 16일 공개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1996-2003년까지 한국경제성장의 몫은 비빈곤층엔 충분히 돌아간 반면 빈곤층 몫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들은 빈곤층을 중위소득 40%미만의 계층, 비빈곤층을 중위소득 40% 이상으로 설정했다. 1996-2000년 시기에 늘어난 가구 총소득을 100으로 했을 때, 비빈곤층은 105.96을 가져간 반면 빈곤층 몫은 5.96이나 줄었다. 2000-2003년 역시 비빈곤층 몫은 104.20, 빈곤층 몫은 -4.20으로 나타났다.

보다 일반적으로 빈곤층이란 소득이 최저생계비(2006년 4인 가족 기준 117만 422원) 이하인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와 그의 120% 이하인 차상위 계층을 합한 것을 말한다. 이 기준에 의거 통계청이 추정한 것을 보면 2003년도에 빈곤층은 460만 명에 달했다. 2006년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142만 명, 차상위 빈곤층이 412만 명으로 도합 554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전체인구(4800만 명)의 10%를 넘는 것으로 국민 10명 중 적어도 1명이 빈곤층이란 말이다. 또한 200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당해 1분기에 상위 10%에 해당하는 부자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776만3천731원으로 하위 10%에 해당하는 가난한 가구의 42만7천684원의 18.2배에 이르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소득 양극화 현상이 해를 거듭할수록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2005년 1분기 도시근로자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격차는 5.87배로 관련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82년 이후 가장 큰 수준으로 벌어졌다. 상위 20%는 평균소득이 1년 전보다 34만원 이상이 늘었지만 하위 20%는 2만7천원 정도 증가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도시근로자 전체를 소득수준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누면 2005년 1분기에 하위 1분위와 2분위 소득점유율은 2004년 동기보다 각각 1.9%와 0.9% 감소한 반면 상위 4분위와 5분위는 각각 0.4%와 2.3% 증가함으로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전국가구로 확대하면 2005년도 1분기의 앞서 언급한 소득격차는 8.22배로 늘어나고 이 역시 통계편제를 시작한 2003년 이래로 가장 높았다.

소득의 양극화는 자연히 지출의 양극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로 교육 양극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역시 통계청에 의하면 2005년 1분기에 상위 10%계층의 교육비는 월평균 59만8천654원으로 하위 10%계층 8만5천645원의 7배에 이르렀다. 상위 10%의 보층교육비(사교육비)로만 보면 월평균 25만7천477원으로 하위 10% 4만567원의 6.3배에 달했다. 2006년엔 이 격차가 더 벌어져 상위 10%의 사교육비는 33만9000원으로 하위 10%(3만4000원)의 10배나 된다. 결국 사교육비를 많이 투자할 수 있는 고소득층자녀가 우수대학에 진학해 고소득직종으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또한 소득 양극화는 건강 양극화로도 이어지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례로 인구 1만 명당 의원수의 경우 부자구인 서울 강남구는 28.25곳인 반면 가난한 구인 서울 강북구는 10.29곳에 지나지 않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인구 1만 명당 의사수는 강남구가 47.47명인 반면 강북구는 고작 8.6명밖에 안 된다. 이런 현실은 사망률의 차이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한국건강형평성학회가 2000년에서 2004년까지 서울시 구별 사망률을 비교해 본 결과 강북구에 사는 사람이 질병․사고 등으로 숨질 가능성이 서초․강남구에 사는 사람보다 30% 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부산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그 원인에 대해 전문가들은 일차적으로 학력과 소득 등 사회경제적 지위의 차이와 이에 따른 건강행태의 차이 그리고 주변 지역의 생활환경, 의료기관 접근성 등의 차이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렇게 소득 양극화는 교육과 건강 양극화로 발전되고 이는 거의 고스란히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자연히 계층간 양극화 현상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나을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의 양극화 현상은 참으로 고질적 병폐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극화 현실을 기독청년이 자신의 과제로 삼아야 할 신앙적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2. 양극화 현상을 과제로 삼아야 할 신앙적 이유

기독청년이 양극화 현상을 가슴으로부터 떠 안아야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슴에 품어야 할 비전은 기도(마 6:10)와 실천(마 6;33)을 통해 하나님나라와 그 정의를 이 땅에 펼쳐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뜻이 펼쳐질 때 그곳이 어디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 그 하나님나라의 통치원칙의 중요한 핵심이 바로 정의이다. 하나님나라의 정의는 매우 포괄적인 실체인데 그 중에 중요한 한 요소가 사회․경제적 정의이다.

이는 신구약을 관통하는 진리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온 세상이 축복을 받아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는 비전을 주셨다(창 18:18-19). 그 비전에 등장하는 공의(righteousness; ṣedāqāh)와 정의(justice; mišpāt)란 단어는 특히 구약에서 한 쌍을 이루어 자주 나타난다(사 5:16; 렘 9:24; 암 5:24). mišpātṣedāqāh에 비해 좀더 법정 용어의 성격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로 보면 mišpāt는 공동체에 속한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권리(렘 5:8)와 그 권리를 지켜주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로 사용될 때 통상적으로 ṣedāqāh와 짝을 이루어 사용된다. 탁월한 구약학자인 크리스토퍼 롸이트는 두 단어의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mišpāt는 공동체의 구성원과 환경이 ṣedāqāh의 상태로 회복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해져야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의와 정의는 자비(mercy)와 신의(faithfulness)와 더불어 율법이 체현하려고 하는 이상이다. 율법에 나타난 정의의 핵심은 가난한 사람들의 기본권을 보장해주고 빈부의 격차를 해소함으로 말미암아 사회 모든 구성원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렘 5:28-29). 하여 구약 율법은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다양하게 보호하고 있다. 그 중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매 칠 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 빚을 탕감해주고 노예에겐 후한 독립자금과 함께 자유를 회복시켜 주는 것과(신 15:12-15) 매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함으로(레 25:10) 가난한 사람들에게 토지를 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가 실현되면 그 공동체엔 자유와 평등이 꽃필 수 있는 기초가 다져지는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서(사 1:17; 9:6-7; 11:1-5), 아모스서(암 5:24), 미가서(미 6:8) 등의 선지서들도 하나님의 통치의 핵심적인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정의임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예수님께선 바로 이러한 구약전통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와 그 정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최후심판에 대한 이야기(마 25:31-46)를 통해 사회적 소자의 기본적 권리를 회복시켜주는 사람이 바로 의인(the just=ho dikaios)임을 분명히 하셨다.

이렇게 성경을 관통하는 가르침을 존중한다면 기독청년은 결코 사회 양극화 현상을 나의 삶 혹은 나의 신앙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외면할 수 없다. 사회 양극화 현상에 눈을 감는 자세와 행동은 우리 자신의 신앙을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겨운 과제라고 해도 우리는 가슴을 열고 받아들여야 한다.

3. 양극화 현상에 대한 바른 이해

양극화 현상을 신앙적 입장에서 해결해나가려고 할 때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양극화 현상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양극화 현상을 객관적 현실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양극화 현상을 문제시하는 것은 보수 논객들이 흔히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시기심의 발로가 아니다. 이런 주장이 신빙성을 확보하려면 부의 축적 과정이 정의로웠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자유시장경제에서 불가능하다.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의 대부라고 불리는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자유시장경제에서 부의 축적은 부분적으로 능력에 의해 부분적으로 운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정확하게 분석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시장경제를 통해 나타난 부의 분배에 공적(merit)이나 상급(desert)이라는 도덕적 개념을 적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양극화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에 굳이 시기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존 롤즈가 명명한 데로 이는 ‘정당화될 수 있는 시기(justifiable envy)’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양극화 현상은 주류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경제성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할 대가로 정당화 될 수 없다. 이 주장은 인간은 자신의 경제행위의 결과를 자신이 모두 획득할 권리가 없으면 결코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념적 전제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기적 속성과 이타적 속성을 갖고 있으며 교육을 비롯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두 속성을 적절히 배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불평등과 경제성장의 상관관계는 상당부분 경제행위자들의 속성과 동기 그리고 문화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설사 불평등이 경제성장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라고 한다고 해도 사회구성원 일부를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속적으로 희생시키는 결과로 얻어진 경제성장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셋째, 양극화 현상은 자연이나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이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에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바가 아니라 바꿔 나가야할 사회적 과제이다. 빗 길을 가다 벼락맞아 죽는 것을 보고 ‘억세게 운이 없구나’고 안타까워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누군가를 향해 ‘도덕적으로 부당하다’고 항의를 할 수 없다. 그러나 양극화 현상은 이 경우와는 다르다. 일정한 그룹간의 양극화 현상은 우리가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바인데다가 한 사회가 집단적 의지를 발휘하여 경제제도를 바꾸면 피할 수도 있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양극화 현상을 해소해나갈 수 있겠는가?

4. 양극화 해소의 길

이는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지난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소수의 노력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독청년에게 절망과 좌절은 금물이다. 소위 긍정적 사고니 믿음이니 하는 것은 자기 개인의 욕심충족을 위해서 보다는 공동체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사용해야 한다. 기독청년은 사회적 소자에 대한 정의로운 사랑, 양극화 해소에 대한 굳은 신념 그리고 설득력을 갖추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염두에 두고 기독청년은 두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 첫째, 양극화 피해자들의 고통과 절망을 공유하고 그들을 직접 도울 수 있는 길을 청년시절부터 모색해야 한다. 이는 소위 사회봉사(social service)차원의 실천이다. 둘째,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제도를 척결하고 양극화를 해소해갈 수 있는 대안적 제도를 개발해나가는 일에 직․간접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는 사회운동(social action)차원의 실천이다. 후자는 전자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기득권층과 그 배후에서 작동하는 맘몬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제도가 확립되도록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믿는 기독청년은 뒤로 물러설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 된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다양한 시민운동 혹은 정당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실천해 가는 최전선에 서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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