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당연하기에 질문하지 않는 것, 혹은 질문하기가 두려운 것들이 있다. 교회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도 거기에 속하는 것들이다. 또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은 별로 인기가 없는 질문이다. 본질을 알고 그것을 구현해 내는 방법이 올바르다는 명제는 진부해졌고, 인기가 없어졌다.‘어떻게’‘성장’할 것인가? 가 가장 인기 있는 질문이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이 묻고, 대답하는 것들이 더욱 의미 있어 보인다.
이 책은 크게 나누어 서론과 4부 그리고 결론으로 되어 있다. 서론적인 부분은 “변하는 교회”와 “교회를 믿을 것인가?”라는 장이다. 1부는 “교회의 근원”과 “교회와 하느님의 나라”장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전조라는 의미를 탐구한다. 2부는 현실 교회의 역사적 본질에 대하여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교회는 성령의 피조물”“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임을 말하고 있다. 3부에서는 참 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여기서는 “교회의 단일성”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보편성, 거룩성, 사도성”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4부에서는 “교회내의 봉사”문제를 다루면서 사제직에 대해서 다룬다. 결론 부분에서는 “세계 속의 교회”를 다루고 있다. 이런 구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교회란 하나님의 나라의 전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전조인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며, 성령의 피조물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런 기본적인 입장을 가지고 참 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속한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를 알아야 하며, 우리가 교회를 세워나갈 때 참된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전조”이기에 우리가 교회를 위해 봉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론에서 중심적으로 다루는 문제는 교회의 본질과 형태의 문제이다. ‘교회의 본질과 형태는 불가분이다. 교회의 본질과 형태는 따로 나누어서 볼 것이 아니라 전체로 보아야 한다. 본질과 형태의 구별은 개념상의 구별이지 실재상의 구별은 아니다.’‘본질과 형태는 같지 않다. 교회의 본질과 형태는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구별해야 한다. 본질과 형태의 구별은 개념적이기는 하나 필요하다. 이 구별 없이 어떻게 변하는 교회의 양상 속에서 항존 하는 요소를 가려 낼 수가 있는가?’ 이런 지혜로운 균형감각을 가지고 교회의 본질과 형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균형감각은 참 어렵다. 그리고 이런 균형감각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세상에서 존재이유(being)와 해야 할 일(doing)을 놓쳐버린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를 향해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보수’(실제로는 골통보수라고 한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 가와는 상관없이)라고 한다. 이런 명칭은 우리에 대한 조롱이 섞여 있다. 이런 조롱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형태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둘을 구분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형태를 ‘보수’하면서 그것을 본질이라고 우겼던 것 같다. 그러다 시대에 뒤 처진다는 자성과 함께 본질과 형태 모두를 다 버린 것은 아닌가? 본질과 형태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반성 없이, 형태의 변화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형태만을 ‘보수’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오셔서 보여주시고, 가르치시고, 성취하신 것이 하나님의 통치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동안에 교회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초로 세워졌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부활의 신앙을 기초로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자신이 가르친 하나님의 통치의 전조로서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는 결정적인 하나님 통치의 전 단계는 아니나 가히 그 전조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실재의 표징이요, 아직 미래의 일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가리키는 전조다. 온전한 의미의 교회는 그러므로 교회 자체에, 교회의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향하는 목적에 있다. 하나님 통치는 교회가 바라고 증언하며 선포하는 그것이다. 다가오는 동시에 이미 현존하는 하나님 통치를 가져다 보존하는 것은 아니나 그것을 외치고 알리는 전령인 교회다. 그것을 가져다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다. 교회는 그러나 온전히 거기에 봉사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령님의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나라의 전조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할 때 우리가 치료해야 하는 현대 교회의 병들을 보게 된다. 현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직자 위주의 그릇된 교회관”“개인주의적인 그릇된 교회관”“ 교회를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인격적인 제도로 보는 실체론적인 그릇된 교회관”“이상주의적인 교회관”등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무기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언이다. 교회는 성령님의 피조물이다. 현대 교회는 성령님에게 불경죄를 범하고 있다. 성령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하거나, 성령님을 무시한다. 성령님은 교회의 영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시다. 하나님의 영이시기에 “어디서나”“언제나 뜻대로”활동하신다. 교회의 삶도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 져야 한다. 성령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카리스마의 공동체에서 온전한 일치와 질서가 이루어진다. ‘모든 카리스마를 부여하는 근원은 동일하다.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모든 카리스마를 부여한다. 모든 카리스마를 지배하는 법은 동일하다. 모든 카리스마가 사랑의 법아래에 있다. 모든 카리스마가 지향하는 목적은 동일하다. 공동체의 건설이 모든 카리스마의 목적이다.’ 이런 말은 분명한 진리이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진리들이 죽어있는 우리의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생활 전체에 현존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 단순하고 분명한 진리 앞에서도 우리는 울어야만 한다. 명목상으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이 주인이거나, ‘주의 종’이 주인이다. ‘예배에 현존하는 그리스도’. 우리의 예배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대목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예배, 성령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누리는 예배,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기뻐하는 예배를 사모한다. ‘추구자(seeker)'가 주인이 되고, 엔터테인먼트가 성례를 대신하는 예배를 걷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되기를..
참 교회와 거짓 교회는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이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도 예전부터 인정되어온 것을 받아들인다. 보편성(일치,카토릭), 거룩성. 사도성이 그 기준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기준에 대한 온전한 개념 정립과 실천에 대한 제안들을 담고 있다. 저자는 먼저 보편성의 문제를 다룬다. 이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가톨릭 교회와 다른 교회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이다. ‘어머니와 딸’로 이 관계를 설명하려고 한다. 이런 설명의 장점은 역사적인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 자립한 다 큰 딸(개신교)들이 혹시나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역사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의 설정은 몇 가지 사실을 설명하는 데 유리하다. ㉠ 이 딸들이 무엇보다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바로 어머니 품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 이 어머니는 딸들에게 묘한 질투를 느끼고 있다. 이런 현실들을 인정하면서 일치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의하여 죄많은 세상에서 구별되어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존재로 변한 신앙인들, 이들이 본래 의미의 성도들의 공동체요 성도들의 교회이며, 따라서 거룩한 교회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신앙인 공동체로서 부름을 받고 스스로 하나님을 섬길 자세를 갖추어, 세상과 구별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의 보호와 지탱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하고도 죄 많은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거룩해 지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언제나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 교회의 사도성은 사도적 사명과 사도적 봉사를 계승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교황)이 아니라, 교회가 계승하는 것이다. 교회는 사도적 봉사를 계속하고 있는가? ‘사도들을 따름으로써 교회는 진정한 복종,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교회의 사명을 규정짓는 것은 분명히 사도적 봉사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도적 증언과 마주치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사도들의 봉사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이런 잣대를 가지고 우리 교회를 계속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의 잣대가 참 교회와 거짓교회를 가른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교회의 모습은 하고 있어나 교회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을 들이고, 인생을 바치고 온갖 고통을 당하며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위해 일하지만 결국에는 헛된 것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참 교회를 세우느냐, 거짓 교회를 세우느냐 일 것이다. 그 다음이 최선을 다하느냐? 그리고 나서야 어떤 열매가 있느냐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얼마나 자주 잘못된 기준과 우선순위에 마음이 빼앗기는지 모르겠다. 참 교회에 대한 분명한 분별력과 변함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 내에서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위치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한다. 더 나아가서 폴 스티븐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구비시키는 자”로서의 나의 정체성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속한 교회 안에서 이런 정체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 갈등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속적으로 고민하게 하는 주제이다.
이 책을 대학 때 처음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분명히 책에 줄어 그어져 있고, 메모가 되어 있으니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무슨 생각을 하며 읽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시 읽으면서 이 책이 가진 포괄성과 핵심적인 언급들에 놀랐다. 카토릭과 개신교의 핵심적인 사상들을 분명하게 꿰뚫어 이야기 하는 것에 놀랐다. 그런 생각들의 역사적 기원과 역사적 현실을 무시하지 않고 다루고 있는 점에서 놀랐다. 가장 본질적인 질문들에 대해서 핵심적인 부분을 다 다루고 있는 점에서 놀랐다.
다시 읽으면서 최선을 다해서 읽었다. 줄을 긋고, 열심히 메모하고, 그러나 이 책을 소화했다는 느낌은 없다. 어떤 내용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알겠다. 그러나 그 내용들이 내 것이 되지는 못했다. 아마도 몇 번 더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동일한 내용을 다루는 다른 책들과 비교해 가면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 이 책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번역의 문제이다. 우리가 잘 쓰지 않는 용어가 많은 데다 번역이 그렇게 매끄럽지 못하다. 아마도 번역이 오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독일어 자체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참 유익한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