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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유 사랑 그리고 모세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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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룩한나그네 2011. 3. 3. 17:19

본문


설교하는 일은 신학자들의 노고에 의지하는 일이다.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밝혀 주는 신학자들로 인해 설교가 설교다울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설교를 하려고 하면 설교자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더해진다. 고민의 근원은 신학자들의 작업이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 “도대체 이 본문이 오늘날 청중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논문을 읽으면서 눈이 열리고, 이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되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러나 나는 설교하는 자로 서 있다. 그러므로 설교하는 자로서의 고민을 가지고 이 논문을 읽게 된다. 이 글은 그런 고민의 몇 가지 단면들이다. 개인적인 깨달음과 동시에 “현재의 청중들”을 염두에 두고 고민하며 읽어 나간 결과들을 적고자 한다.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처음 부딪치는 고민은 “상황”의 차이다. 

갈라디아 교회들에 들어온 대적자들이 제기했던 문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방인 신자들의 신분문제이다.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복을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아브라함과 같이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방인 신자들의 삶의 문제이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모세 율법을 삶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이런 교회의 특수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나의 고민은 이런 갈라디아교회의 상황과 현재 “청중들”의 상황이 어떤 상관이 있냐는 것이다. 할례를 강조하거나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다. 이단들을 제외하고 모세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없다. 이런 상황의 차이는 갈라디아서를 연속적으로 설교할 때 어려움을 준다.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논리적이고, 전략적으로 편지를 쓰고 있다. 적을 죽이고, 아군을 살려내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설교자가 이 본문으로 설교하려고 하면 적이 없다. 갈라디아교회를 괴롭히던 적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당황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복음의 적들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적들을 향해, 갈라디아서의 어조와 논리를 가지고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논문에서 새롭게 배운 것은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자유”라는 의미이다. 모세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생각하면서도 은연중에 칼빈의 해석대로 생각했던 것 같다. ‘율법이 가르친 의가 아니라, 율법의 엄격한 요구들과 그 요구들로 말미암는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갈라디아서의 자유는 “율법 전체에서 벗어난 자유”이다. ‘ 이 자유는 그리스도가 친히 율법의 저주가 되어 자기 몸을 내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 ’ 이런 바울의 선언은 갈라디아서 안에서는 너무나 힘차고 놀라운 것이다. ‘이처럼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구원을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의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대적자들이 요구한 모세율법을 지키는 것은 ‘자유를 위하여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자유를 주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말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말 중의 하나이다. 특히 젊은이들은 자유를 갈구한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를 설교할 때 가장 매력 있는 메시지는 “자유”라는 메시지이다.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우리는 구원 얻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필요없다고 말한다. 오직 하나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증거될 때 청중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입에는 기쁨이 넘친다. 자유만을 선포하고 끝나지 않는다. 13절은 하반절은 자유가 또 다른 측면을 말한다. 세속적인 자유는 마치 “철로 없는 기관차 같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그렇지 않다. 갈라디아서의 자유는 “--으로부터의 자유”이면서 “--을 향한 자유”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자유는 진정 “자유”인 것이다. ‘바울은 13절에서 하나님께 받은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라고 권면한다. 첫째,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는 결코 육체의 욕심대로 사는 방종일 수 없다. 둘째, 바울은 자유를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기회로 삼으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여기서 “종이 되라”고 명령한다.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 자유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서로에게 종이 되는 것,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신자의 삶이다.’ 진정한 신자의 삶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가? 복음으로 인해 철저히 자유롭게 된 신자, 그러나 사랑으로 인해 스스로 종이 되어 섬기는 신자. 이런 신자들이 넘치는 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고, 청중들을 생각할 때 이 부분에서 큰 죄악에 빠져 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하게 자유롭지도 못하다. 적당히 자유롭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세속의 사슬에 매인 죄수 같다. 리차드 포스터의 분석처럼 “돈, 섹스, 권력”의 사슬에 매여 있는 것 같다. 교회 안에서는 자유로와 보이지만 세상 속에서는 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는 삼손처럼 무거운 맷돌을 돌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종이 되는 섬김이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섬김이 하나의 장식이 되는 듯 하다. 종으로서의 섬김이 아니라 군림함으로 섬김의 자세와 모습들을 더 자주 보게 된다. 나 또한 섬김을 위해 종이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종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종이라고 인정하기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 받았을 뿐 아니라, 형제자매들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몸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때가 많다. 이런 면에서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여전히 죄의 습관에 매여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 메시지는 중요하다.

13절의 명령이 중요한 이유는 14절 때문이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온 율법이 모세 율법을 가리킨다면 이 절은 모세 율법 전체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한 말씀으로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온 율법을 성취(완성)했음을 말한다. ‘갈라디아서 5:14절에서 온 율법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완전한 사랑의 행위를 통해 모세 율법의 요구와 의도를 완전히 만족시켰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자체가 모세 율법의 전체의 진정한 요구이거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요구일 뿐만 아니라 율법의 종말론적 목표이기도 하다.’ ‘이처럼 갈라디아서 5:14에서 바울은 우선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사건을 마음에 두고 있다. ’ 이런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오늘날의 청중들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바울 서신서에서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모세 율법의 모든 문자적인 요구들을 행하지 않고도 율법의 전체 요구 또는 종말론적인 의도를 완전하게 만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13절과 14절에서 바울 사도는 신자들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 때 온 율법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지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결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자는 히브리서의 명령처럼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더불어 ‘오직 지시하고 제어하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사랑으로 종노릇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갈라디아서 5:14는 신자들이 율법의 개별조항을 준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자는 율법의 개별 조항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함으로 온 율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4절의 설명을 읽으면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는 구절을 생각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중 하나가 바로 형제자매들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닐까? 제자도의 기본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면, 제자도의 기본이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 기본을 무시하고 제자의 삶을 살 수는 없다. 이런 면에서 이 구절은 제자도를 재는 중요한 측도가 될 수 있다. 또한 성령 충만의 구체적인 증거도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다. 최근에 젊은이들의 집회를 중심으로 성령님의 일하심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방언, 예언, 치유 사역, 넘어짐 등의 현상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중심적인 잣대는 “섬기는 종”“사랑의 실천”에 있다. 이것을 좀더 확장 시킨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한 삶의 원리와 가치체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를 지면서 보여주신 삶의 유형을’ 말한다. 이런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실천하게 하시기 위해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시는 것이다. 설교할 때 이런 기준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성령님의 역사는 신비롭고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규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은 참된 성령님의 역사와 거짓된 성령님의 역사를 구분 할 수 있는 잣대는 제시한다. 이런 잣대를 잘 가르칠 때 청중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것들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15절은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실제적인 예를 들고 있다. 서로 물고 먹는 모습이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13,14절에서 말한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바로 이런 모습을 바로 잡기 위해서 바울은 13,14절의 교훈을 준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원리를 설명한 다음에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다. 15절을 말할 때 갈라디아 교인들은 무엇을, 누구를 말하는 지 너무나 명백하게 알았을 것이다. 이렇게 설교하기 위해서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사안을 말씀으로 분석하고, 죄를 지적하고, 그 죄로부터 돌이길 것을 요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으면 설교는 좋은 말로 끝나기 쉽다. 그 말씀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돌아가기 쉽다. 그러므로 설교하기 위해서는 청중들의 구체적인 상황을 알고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상황이 가지는 죄악과 문제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죄에서 구체적으로 돌아서도록 촉구하는 것이 설교자의 책임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용기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준다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설교는 분명 정확한 본문 해석에 기초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이런 좋은 논문을 읽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설교의 방향과 내용을 잘 잡아준다. 그래서 고민은 더해지는 것 같다. 나는 언제쯤 이렇게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더불어 나는 언제쯤 제대로 된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고 노력해보지만 늘 그 자리에 머무는 듯 하다. 그러므로 기도하게 된다. 주여 도와주소서. 그러므로 겸손하게 된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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