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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신학-게할데스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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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룩한나그네 2011. 3. 3. 17:20

본문


15장 신약 계시의 구조

신약 계시의 구조가 성경자체로부터 결정될 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다. 

1. 구약에서의 지시로부터

구약시기는 널리 앞으로 비치며, 앞을 내다보는 시기이다. 구약은 새로운 것을 향하여 있다. 선지 활동은 이것에 가장 좋은 지시자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선지활동에서 예언은 우연적인 부수적 요소가 아니라 바로 그 본질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종말론적이고, 메시야적인 예언은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도 상대적으로 더 나은 상태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와 그 발전의 연속과 대조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영속적인 상태로서의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그 예언적 태도를 통해서 신약을 요청하고 있다. 이런 태도를 대표하는 신학적 용어가 새 언약이다. 이것은 예레미야31:31-34에 나온다. 이 새 언약은 분명히 신약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본문에서는 새 언약이 옛 언약과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법을 그 마음에 기록하여 그 법에의 복종을 만드실 것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죄의 완전한 사유가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하는 작업과 관계 있는 것은 새로움이 단지 종교적 상태의 일반적인 것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것과 계시의 영역에까지도 놀랍게 확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2.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예수님이 이 새 언약을 언급하신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는 “언약의 내피”“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 하셨다. 우리 주께서는 여기서 당신의 피가 하나님께 대한 제자들의 새로운 종교적인 관계를 여는 것과 기초라고 여기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새로운”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할 때는 그 마음에 과거의 것은 파기되고, 새로운 것이 대체된다는 대조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물의 새로운 질서는 그것이 다시 변한다든지 파기된다든지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최종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것이 분명히 시사되어 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 종말론적인 상태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새 언약이 영원한 것임을 처음으로 나타내셨다. 그렇다고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대조가 계시의 대조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께로 종교적인 접근에서의 새로운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3. 바울과 다른 사도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구속사와 계시사의 기본적인 양대 구분에 대한 위대한 설명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새 언약과 옛 언약의 형식적인 구분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또한 두개의 종교적 사역들 사이의 대조를 처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문자의 사역과 영의 사역, 또 정죄의 사역과 칭의의 사역 말이다. 모세와 바울의 사이의 사역의 차이 배후에는 분명히 계시의 차이에 대한 사상이 있는 것이다.

1) 새 시기는 최종적인 시기이다.

히브리서 1:1-2에서도 구약과 예수님, 그리고 바울의 말과도 같이 새시기는 최종적인 것임이 주목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이 시기를 도입시키는 계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 계시는 다른 것이 이것에 이어질 정도의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는 더 있을 것이 없는 극치의 계시인 것이다. 아들로 하신 말씀 외에는 더 높은 말씀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바울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보내진 것을 때가 차서 일어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어디에도 축적적인 관점은 없다. 그리스도는 그가 중심으로 한 유기적인 계시운동의 핵심이며, 전체 계시과정을 끝내시는 분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계시는 성신이 오셔서 알려주셔야 했으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다. 만일 사도들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비추이는 빛이 없으므로 가리워졌을 것이다. 예수와 사도들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사실과 이 사실에 대한 후속적인 해석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이 우리로 하여금 신약계시와 그 역사적인 해설, 즉 신약성경신학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면서 실제적인 신약성경신학은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계시와 사도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계시와의 구분이다. 

2) 더 이상의 계시가 기대되는가?

우리가 신비적인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면, 즉 주관성 보다는 객관성을 중시한다면, 이에 대한 유일한 옳은 대답은 초자연적인 성격을 지닌 새로운 객관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일련의 해석을 주실 때에만 새로운 계시가 더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종말 때에는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일어나는 것은 모세 시대와 초림때에 있었던 위대한 시기와 같은 가치를 지니는 구속사의 새로운 시기를 만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셋째시기가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둘째 계시의 시기의 극치 외에 다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지막 시기로서의 신약계시에 속하게 될 것이다. 


16장 성탄과 관련된 계시

사건이 먼저 일어나고 이를 해석하는 계시가 뒤따른다. 여기서 일어난 사건은 흔히 신학적으로 성육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땅으로, 신적인 것으로부터 인간적인 것으로의 수직적인 운동을 묘사한다. 그 가운데서 선재하시는 메시야가 인간의 성품 속에 들어오시며 초역사적인 분이 역사의 흐름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 속에 이에 대한 언급과 인유가 있으며, 요한복음서의 가르침에는 더 흔하고 평이한 것이다. 바울에게서는 이 교리가 완전히 명백한 형태도 나타난다. 그리고 제4복음서와 요한서신의 서언은 이에 전형적인 형식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신약계시의 진보에서 후기 단계의 특징이다.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는 시점에서는 그 운동은 수평적인 성격을 부여받는 것으로 보인다. 여호와께서 그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메시야 사건이 여기서 실현된다. 예언의 이상성이 이제 실제의 구체적인 형태를 띄게 된 것이다. 

1. 탄생의 여러 측면들

탄생에 대한 여러 자료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양상들을 다음과 같다.

1) 이들은 사용된 표현양식상 구약과 잘 조화되고 있다. 

이 양상은 두 계시 사이의 연속성을 말해준다. 새로운 시기는 선조들의 언어로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먼저 전달해 주려고 하는 구약 안에서 그 경건을 키운 이들에게 그 계시를 보다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리아 찬송은 시편의 인용이 많으며, 그 구약적인 원형인 한나의 기도-찬송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2) 또한 새로운 것들을 구약 구속사의 유기체에 적절하게 하려는 의도가 눈에 띤다. 탄생이 거룩한 선지자들에 의해서 예언된 하나님의 종 다윗의 집안과 연결된다. 그리고 아브라함, 마침내 태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 앞으로 일어날 새로운 과정이 계속해서 구속적인 성격을 띠고 묘사된다. 하나님에 의한 객관적인 선언에서와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이해에서 모두 죄와 무가치가 배경이 되고 있고, 이에 상응하는 은혜와 구원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표현이 마리아의 찬송중에서 발견된다.

4) 또 하나 중요한 것으로는 이들에는 정치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요소 그 자체로는 반박될 필요가 없음은 구야적 신정 아래서는 국가적인 것과 종교적인 이해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5) 또한 유대교의 율법주의는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유대인들의 구상으로는 먼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면 그 보상으로 그에 속하는 모든 것과 함께 메시야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구상으로는 신적 은혜의 선물로서 먼저 메시야가 나타날 것이고,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올바른 순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의 효과는 이중적이다. 율법의 위치를 과정의 처음에서 마지막으로 옮김으로써 유대인의 자기-의가 제거되며 마지막에 놓아 율법의 그 영구한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구원의 윤리적인 의미가 강조되는 것이다. 

6) 구약과의 밀접한 유대는 이 초기 계시들이 옛 종말론적 예언의 두 계열을 연장하고 있음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 중의 하나는 최고의 신정에서 여호와 자신의 임하심을 향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메시야의 오심을 향하는 것이다. 구약 계시에서도 이 둘이 서로 상충적인가 하는 것은 분명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한 기자가 선지자가 어떤 상황에서는 이편을 사용하는가 하면 다른 상황에서는 저쪽 표상을 쓰기 때문이다. 신약계시가 충분히 발전할 때에야 비로소 신적인 메시야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오셨다는 가르침을 통하여 그들의 일치가 완전히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용어 상으로 볼 때, 우리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란 진술과 예수계서 구원하시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예수의 백성이다.란 진술을 밀접히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7) 이 계시들은 복음의 보편성에 대한 분명한 시사가 있다. 시므온에게서, 마리아의 찬송중에 나타나는 가르침들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어둠을 가진 이방에의 비추임을 예언하는 듯 하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성경에서 보편성에 대한 또 선교에의 주장에 대한 처음 계시는 아니다. 그러나 유대교적 개종은 유대인이 되어야만 이스라엘의 특권을 이방의 누구에게라도 허용한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는 반면 여기에는 유대인의 불신앙을 통하여서 이방인들이 들어오게 된다는 사상이 있는 것이다.

8) 이들 계시에 분명한 성격을 부여하는 마지막 요소는 메시야의 초자연적인 출생이 인간 아버지 없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생각이나 사상들이 있어서 그리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다음의 세 가지 방식으로 설명해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죄의 전가에 의한 아기의 유죄성과 관계되는 것이다. 성신의 행위는 오염된 죄의 전가를 막는 것이 그 목적의 하나였음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로, 이미 선재적으로 특별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인성을 입으시는 데는 이런 탄생의 형태를 취하시는 것이 적절했다고 생각해보게끔 된다. 하나님의 특별한 아버지 되심이 사람의 아버지 됨을 배제한다는 것에는 아무 의심할 것이 없는 것이다.

세 번째 관점은 그리스도의 전체 인격과 사역의 초자연성을 직접 하나님에게서 온 그의 인성에 기원에로 돌려서 보는 것이다. 


17장 세례 요한과 관련된 계시

많은 현대의 학자들은 세계 요한과 예수를 분리해서 보려고 한다.

발덴스 페르거는 요한이 예수께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비역사적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1장과 3장에 걸쳐 많은 지면이 요한에게 할애된 것은 그 당시 기독교회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세례종파가 그들의 주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을 했음을 확신시키려는 변증적인 목적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또 두 집안간의 관계와 연락을 통하여 요한과 예수를 가능한 이른 시기부터 연결시키는 누가복음의 탄생 이야기는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문제에 있어서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더 큰이를 요한의 초기 선포의 기록을 그리스도 일반에 대한 언급으로 생각지 않고 최고의 신현으로 여호와 자신이 나타나시는 그리스도 없는 종말론적 프로그램에 기초하여 해석하려고 한다. 이것은 예수와 요한을 개인적으로 나누는 것일 뿐 아니라 교의적으로 요한과 메시야적 희망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다. 

요한을 예수로부터 떼어내려는 이 시도들 중에서 가장 극심한 것은 양자의 선포가 그 정신과 내용에 있어서 대립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요한이 바란 것은 상당히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무력의 사용을 함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해서 명백히 반대한다. 이제 몇몇 증거들을 살펴보자.

1. 마태복음 11:2-19절

예수께서는 세 번의 반복된 질문을 통해서 요한에 대한 부당한 의견, 오류의 의견 둘을 교정하신다. 그 첫 오류와 교정이 7절이다. 즉 세례요한의 분명한 의문은 그 자신의 요동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둘째오해는 8절에 기술되어 있다. 그의 회의는 옥중생활의 불편에서 온 것도 아니다. 세 번째 대답은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분류하는 것에 비록 충분히 표현된 것은 아니라도 기본적인 진리의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이다. 선지자보다 큰 자라는 것은 요한이 예비하는 사자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여기엔 제한이 붙음을 말씀하신다. 즉 요한 자신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시작되는 새 시대에 속한 것으로는 분류할 수 없다. 

2. 세례요한과 엘리야

그의 모습과 광야생활 등은 위대한 회개의 선지자였던 엘리야의 재판이다. 유대인들은 문자적인 엘리야의 부활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했다.그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실제걱인 의미의 엘리야임을 부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확언하신 상징적인 의미에서는 그렇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사야와 말라기의 예언들이 그에게서 실현되었음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한이 앞서 온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전체 구약이 앞서는 것과 그 모든 의미가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 형태에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실제 내용이 요한에게 요약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3. 예수께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예수의 메시야됨에 대한 세례요한의 증언은 두 국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그 하나는 주로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또 하는 제4복음서에 나타난 것이다. 첫 국면의 특성은 비록 메시야로 분명히 지칭되지는 않았지만, 오는 자의 심판하시는 기능과 그의 심판에 강조점이 있다. 

4.요한의 세례

요한의 세례 일반과 요한에 의한 예수의 세례와는 따로따로 생각해야만 한다. 

요한의 세례 일반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요한의 세례는 빠르게 임하는 심판을 바라보는 것이고, 이에 적합하게 준비하는 것의 보증인 것이다. 종말론적인 의미의 보증으로서의 세례개념은 기독교 세례에도 그래도 있는 것이다.

5. 요한에 의한 예수의 세례

마태복음 3:13-15절에 나타나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대화를 살펴보면 예수의 세례의 의미를 잘 깨달을 수 있다.

1) 요한은 예수께서 그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음을 밝힐 정도로 예수의 위치와 성격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2) 이 요한의 확신은 예수의 메시야직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예수의 무죄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3) 또한 자신이 시작한 것이라는 이유에서 했던 요한의 거부는 예수께서 이제 허락하라고 주장하심으로 확언되었다. 

4) 이 객관적인 필연성은 영원하고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반쯤 열려 있으나, 미래를 배제한 필연성인 현재 상황에서만 작용하는 어떤 것이다.

5) 이 현재의 필연성의 이유는 예수에 의하면 자신이 지켜야할 의무의 문제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6) 개인적인 면에서는 예수 자신에게 의무로 지워져 있지 않은 것도 그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부속성 때문에 그에게 신적으로 부과되 의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과 동일시되어 셰례를 받으시는 것 외엔 이를 더 잘 표현할 형식이 없는 것이다. 

6. 예수 위에 강림하신 성신

세례가 예수의 메시야 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론을 지지할 수 없다. 

이는 내 사랑하는 이라는 목소리는 예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리고 누가가 형체로 비둘기 같이라고 한것도 시각적 현상의 주관화에 반대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요한복음 1:34로 부터는 이것이 예수에게 뿐 아니라 요한에게도 인식할 수 있었음을 본다. 

예수께서는 성신을 성화의 동인으로서 받으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죄 많음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 복음서에선 어디서도 그런 기능의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표현된 그의 마음과 목적에 대하여 아버지의 승인의 보증으로서 성신을 받으신 것이며,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효과의 보증으로서 성신을 받으실 수 있었고 또한 받으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메시야적 사역을 수행하시는 것을 위한 당신의 인성의 실질적인 준비를 위해서 성신을 필요로 하셨다. 예수에 대한 이 영의 부여와 옛날 선지자들이 받은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에게는 성신이 전체적이고 지속적이라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7. 세례 후 예수께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 1:15,30절

이는 메시야의 경력을 두 시기로 구분하여 말한다. 세례요한 뒤에 오는 국면 즉 공생애에서 세례 요한을 잇는 것과 세례 요한이 나기도 전에 오는 국면 즉 구약 하에서의 메시야의 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구약의 정황으로 불 때, 요한 뒤에 오는 이가 실제로 여호와와 그 사자와 같다면 요한은 거의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2) 요한복음 1:29,36절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는 선언은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죄짐을 말하는 것이다. 이 발언을 그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단지 이것을 곧 뒤따라 일어났던 큰 사건, 즉 예수의 세례라는 빛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린양에 대한 두 전거는 희생제의 어린양에서와 이사야 53장에서의 여호와의 종인 어린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호와의 어린 양이라는 말은 여호와의 종이란 말의 정확한 반복인 것이다. 이것은 죄를 지는 사역을 담당하는 어린 양이 여호와께 속하며 여호와를 섬긴다는 뜻이다.

3) 요한복음 1:34절

여기서 세례 요한은 예수 위에 성신이 임하시는 표적적인 배경을 증언하여 관찰하고 응답하는 그의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은 좀더 정확하게 나는 보자마자 말했다로 해석할 수 있다. 주어가 내 자신이라고 표현되 것은 한편으로는 이것이 목격 증언이라는 것과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공식적인 증언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4) 요한복음 3:27-36절

요한은 여기서 자신과 예수 사이의 경쟁의 가능성을 추측하는 것은 부조리하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사자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시기 때문에 마치 신랑의 친구가 신랑에 대하여 시기할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이 요한도 예수께 대하여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사역은 자신이 물러나 있고 거기에서 그는 최고의 기쁨을 찾은 것이다. 31절 이하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초월적인 세계로부터 임하셨다는 것, 천상계에 대한 그의 지식의 경험적인 성격, 그의 하나님과의 동일시, 그래서 그의 말을 듣는 것이 곧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친다는 것, 계시영역에서의 그의 포괄적인 권위, 영생을 가져다주는 신앙의 기능, 특별히 바로 앞에 니고데모와의 대화와 관련하여 이들 중의 몇 가지에 관하여는 놀랄만한 접촉점이 있다. 


18장 예수에의 유혹에서 나타난 계시

1. 광야에서의 유혹

이 사건은 앞 뒤 사건들과 끊을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런 연관성을 놓치고는 실재하는 사건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복음서의 역사를 신화론적으로 해석하는 원칙에 의하면 이것은 사상을 이야기의 형태로 구체화한 것이라고 선언된다. 이 견해에 의하면 예수 자신은 사건의 개념이나 그 형태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신화가 틀을 제공하고 구체적인 상들을 구약역사에서 빌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론적 해석은 이 이야기를 예수의 생애의 실제적인 사건으로 여기기는 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일을 말씀하셨는데, 실제적인 의미에서 이해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생애 동안 그를 넘어뜨리려는 많은 유혹들의 인상을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비유로써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의도를 오해하고서 이를 한번 구체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12:29절을 통해 보면 이 사건은 분명히 구체적으로 일어났던 일이다. 이 구절은 분명히 역사적인 현실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구절은 객관성도 보증해 준다. 그리고 이 구절이 유혹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귀신들을 쫓아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성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유혹의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예수께서 성신에 충만함을 입어 광야에서 성신에 이끌리셨다. 이 진술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운다. 첫째는 그를 시험으로 이끄신 신은 그의 메시야적 성신이다. 둘째로는 그와 비슷한 것으로 성신의 원조하에 한 것은 그 배후에 하나님 자신이 계신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런면에서는 이 사건은 유혹사건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더 높은 목적의 관점에선 예수의 시험이라고 표현함이 가장 좋을 것이다.

2. 주님에의 유혹과 우리 자신에의 유혹

이 사건을 오해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것으로부터 우리 자시의 유혹과의 유비를 찾아내려고 하는 경향과 습관 때문이다. 예수의 유혹과 우리의 유혹사이에 유비가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창세기 3장의 아담의 유혹에 나타난 동일한 양면의 목적이 들어 있는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험이 예수의 구속사역의 구속적 과정의 배후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3. 우리 주님에의 유혹의 특별한 형태

우리는 두 가지 이론을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특별히 그의 메시야적 직책에 속하지 않은 물질로 유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죄된 행동은 윤리적 법칙 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도 유혹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의 메시야적 소명과 어떤 식으로라도 관련되어져 있는 유혹거리여서 그것이 범하여지면 특별한 메시야적 죄가 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4. 주님에의 유혹에 대한 해석

우리는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서 유혹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신명기 8:3절

예수에 의해서 나타난 마음의 상태를 가장 잘 표괄할 수 있는 용어는 신앙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내적 복종의 정신을 말한다. 유혹의 고통은 그것을 충분히 감지하고서 이와 함께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충분한 능동적인 반응을 가지고 견뎌야만 한다. 

신명기6:16절

여기서의 시험은 더 이상의 신뢰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시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뢰를 불경건하게 시험하는 것과 관련되어 진다. 이렇게 해서 얻게 되는 안전감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서 간청된 증시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유혹의 본질은 외부적인 위협으로부터의 보호이다.

신명기 6:13절

여기서는 공공연한 죄의 행동을 시사한다. 여기서 교사된 행동은 그 자체로 죄악된 사단숭배의 행위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1) 사단은 급습의 효과를 계산한 듯하다. 2) 그는 이전의 대답들에 나타난 순종과 섬김에 깊이 뿌리박힌 예수의 본능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처는 참된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예배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거짓된 신들과 종교에 대한 거부이다.

5. 유혹받을 가능성과 범죄 가능성

예수는 유혹받은 가능성이 있는가? 예수는 범죄 할 가능성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명쾌한 대답도 할 수 없다. 


19장 예수의 공생애에서의 계시

1. 그리스도의 계시적 기능의 여러 측면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와 후재를 염두에 두고 생애를 살펴야 한다. 그럴 때 진정한 계시를 볼 수 있다. 

1)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의 네 분야

① 자연 안에서의 계시,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창조 때부터 무한히 계속되어 나가는 일반계시

② 죄의 유전과 구속의 시작으로부터 성육신 때까지의 구약 경륜 하에서의 계시

③ 주님의 탄생으로부터 그의 부활과 승천하시기까지의 지상의 공적 사역 동안의 하나님의 계시

④ 그가 승천하신 뒤로부터 성신의 무오한 인도하심 아래서 되어진 마지막 영감 된 증인의 죽음에까지 미치는, 그의 선택된 종들을 통하여 그가 중재하셨던 계시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에게 드린 로고스라는 이름아래 이 4가지가 포함된다.

2) 복음서에서의 예수의 계시적 사역

한편에서는 예수는 자신이 어떠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였다. 즉 그의 성품이나 그의 성격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예수는 또한 그가 하신 말씀을 통해서 즉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씀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3) 발전에 관한 문제

예수의 가르침 내에 발전이 관찰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의 입장은 주관적인 발전이 허용될 수는 있으나 이에 대해 실질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고, 오직 가르침에 있어서의 객관적인 발전은 필요했으며, 그 분명한 증거들이 지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발전이라고 할때 그것은 부분적인 것에서 진리에 더 포괄적이고 적절한 이해로 가는 발전을 말한다. 

3. 예수의 가르침의 방법

예수는 진리를 조직화하고 교의적으로 응집성 있는 진술의 특징이 없다. 예수의 가르침의 전체의 폭에는 어떤 주제를 정의하는 접근이 실제적으로 없다. 대신 구체적이고 구상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1) 직유와 은유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사물이나 인물을 다른 영역의 사물이나 인물과 비교하는 것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직유법은 그 비교를 분명하게 하는 데 반해서 은유는 비교되는 것을 비교하는 상의 이름으로 부름으로써 그 비교를 함축적으로 만든다.

2) 제한된 의미의 비유

이것이 직유와 비교해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3)특례의 비유

가르침의 특례의 원칙에서 사용한다. 특례의 방법이란 교훈이나 원칙을 추상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그것을 나타내는 한 특별한 경우를 우리 앞에 내세우는 방법이다. 

4) 풍유의 방법

알레고리란 한 중요한 비교점이 의도적으로 나타난 이야기가 아니라 이 한 비교점을 중심으로 하여서 두 과정이 나라히 상세하게 비교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그리고 교묘하게 꾸며진 이야기라 정의할 수 있다.

5) 비유적 가르침의 철학

비유의 가르침의 목적은 분명히 진리를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더 생생히 전달하려는데 있다. 두 번째 목적은 비유가 편견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목적은 현대인들의 마음에는 생소한 것으로 진리를 가리우는 데 있다. 

6) 제4복음서에서의 참과 참됨

참된 것이란 그들 안에 객관적인 성격을 지닌 객관적인 것으로서의 본래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참으로 본래적인 것이다.

4. 구약성경에 대한 예수의 태도

1) 성경의 종교

① 예수의 말씀들은 성경에서 인용된 단어들과 구절들과 표현형식들로 가득차 있다. 

② 예수께서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원칙으로 여기신다.

③ 예수께서는 자신의 메시야적 성격과 사역을 그 안에서 구약예언이 성취되는 것으로 지적하심으로써 확증하신다.

④ 위에서 말한 모든 것들은 구약에 관한 우리 주님의 태도를 간접적으로 규정한다. 

⑤ 그의 반대자들도 예수의 성경에 관한 태도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2) 몇 가지 비판적인 주장들에 대한 반증

문제가 되는 구절들 요한복음 1:17절,10:8절,율법의 완성에 대한 산상수훈의 가르침등은 모두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통해 해석되어야 한다.

5. 예수의 신론

예수는 구약의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을 선포했는가? 그렇지 않다. 대표적으로 사두개인들과 논쟁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당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셨다.그는 전체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이런 주장을 구약과는 전혀 다른 주장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구약과는 약간 다른 면이 나타나는 이유는 ① 구약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외부로부터 내면으로 움직여 감에 비해 신약에서는 어느 정도 그 반대의 방향이 눈에 뛴다는 옳은 관찰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계시 과정의 일반적인 운동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것이 다른 주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② 하나님 아버지 되심과 이에 상응하는 아들 됨은 구속적인 개념이다.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께서 하나님께 대한 자기 자신의 관계에 제자들을 인도하시는 것이 주도적인 사상이다.그러므로 복음서가 말하는 아버지란 말은 “나의 아버지이신 분이 나를 통해서 너희 아버지도 되신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복음서에서는 아버지 되심의 범위가 확장되었으며, 그 확장을 가져온 수단이 된 아버지됨의 개념 자체가 더 심오하고 개인적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위엄과 크심에 대한 예수의 강조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의 초월적인 면이 상당히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하늘에 계신 엄위의 이 두 요소를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그것들은 상호 작용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위엄과 크심은 하나님의 사랑에 특별한 성격을 부여해준다.

3) 하나님의 응보적인 의

하나님의 응보적인 의는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요소이다. 하나님은 징벌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성품은 다른 성품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6.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1) 기본적인 문제들

① 구약에서의 하나님 나라

우리는 구약에서 나라란 말을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용어들의 주도적인 추상적 의미들을 상기해 보아야만 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그 신성적 나라가 결코 모두 파기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나라를 새롭게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정도로 사라져간 때가 있었다. 메시야적 왕은 언제나 궁극적인 왕인 여호와의 완전하고 이상적인 대리자일 것이다.

② 복음서에서의 하나님 나라

그것은  나라로서의 일정한 영토, 또는 나라라고 불릴 수 있는 일련의 사람들, 아니면 나라로 지칭될 수 있는 권리,이익,재물들의 복합체이다.

③ 하늘나라

이 용어는 그 나라가 이 땅의 나라들과는 다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하늘이라 불리울 수 있는 분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④ 하나님 나라에 대한 현대의 이론들

현대의 이론들을 예수의 무오성을 부인한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동의 할 수 없다.

⑤ 그 나라의 양면적 개념

첫째는 현재적, 내재적 영적발전의 개념이고, 둘째는 격변적 종국 도입의 개념의 양면이다. 

현재적 나라는 점차 임하나, 종국의 나라는 격변적으로 임한다.

현재적 나라는 주로 내면적이고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임하나, 종국의 나라는 세계적으로 불 수 있는 표현 형태로 임한다.

현재적 나라는 종말점까지는 불완전하게 남아 있을 것이나, 종국의 나라는 아무 부족이 없을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의 본질

① 권능의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최고권

권능은 그 나라의 구성요소중 첫 특정한 종류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나라를 형성하는 권능은 성신과 연관되어져 있다. 

② 그 나라의 권능과 관계된 신앙

신앙은 하나님의 권능과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또한 은혜와도 관련을 가지므로, 상호연관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첫째로, 이적들은 신의 은혜를 중시하고, 수혜자들에게 신뢰의 마음 상태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내는 자비로운 구원행위라는 점이다. 둘째로 신앙은 영혼의 인식작용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

③ 요한복음에서의 신앙

a) 신앙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그래도 잘 나타낸다는 사상으로 인해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예수와 관련되어져 있다.

b) 신앙은 예수와 신자들간의 계속적이고 일상적인 관계인 것이다.

c) 신앙은 선취로서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를 붙잡는 것이다.

d) 신앙과 지식의 가장 밀접한 관계가 여기에 있다. 

e) 불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본성의 근본적으로 잘못된 태도에서 발생하는 것임이 나타난다.

④ 의의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최고권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동일한 것이다. 의는 그 나라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의가 먼저오고 그 나라가 이에 따르는 보상으로 온다.

⑤ 유대교의 윤리에 대한 우리 주님의 비판

유대교의 심각한 문제는 외형주의,율법의 파괴, 부정주의, 자기 의, 외식의 문제등이 있었다.

⑥ 회개

회개를 의미하는 단어는 몇 가지 있다. 후회하다는 뜻, 율법을 바꾸거나 역전 시키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를 돌이키다는 의미도 있다.

회개는 모든 사람에게 부과된 것이다. 또한 회개가 가져오는 생의 새로운 방향은 그 전체 욕망과 목적을 하나님으로 하는 전체 생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종속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⑦ 축복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은 최고권을 가지신다

⑧ 하나님 나라와 교회

마태복음 16:18-20절을 보면, 교회와 하나님 나라가 분리된 기관들로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주님이 내 교회라고 하셨다. 내 교회는 메시야의 교회가 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지금까지 있어온 구약의 교회조직과 대조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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