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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와 학사의 삶

내가 쓴 글들

by 거룩한나그네 2011. 3. 3.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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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학사의 삶을 시작하다 (열왕기상 17장 통해 본 학사의 삶)

확신에 찬 출발 
엘리야는 확신에 차서 출발한다.(왕상17:1) 
하나님에 대한 확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 (나는 하나님의 대리자다.) 자신의 사명에 대한 확신( 나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다.) 
엘리야처럼 우리도 확신에 차서 학사의 삶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 하심에 대한 확신.
이런 확신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수련회를 통해, 소그룹을 통해, 개인적인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면서.
“ 저는 대학 들어와서 IVF를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 수련회에 참가해서 저녁 설교를 듣는데, 하나님이 저만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의 영적인 상태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설교를 듣고 아침묵상을 하면서 고민했던 내용을 저녁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인생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아브라함을 묵상하고 있었는데,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으로 다가왔어요. 하나님이 저의 길을 보여주시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실 것임을 분명히 해 주셨어요.”


뒤엉키는 삶. (왕상 17:2-18)
학사가 될 때, 우리는 무엇을 꿈꾸는가? 
확신에 찬 출발을 하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예상했던가?
학사로 살면서 우리의 삶은 뒤엉키기 시작한다.
우리의 계획과는 다른 일들이 끼어들면서 우리의 삶은 뒤엉키게 된다.

엘리야의 삶은 뒤엉켜가는 한 인생의 모습을 보여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하나님께서 뒤엉킨 삶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다.
확신에 찬 엘리야의 설교.(1절) 이 설교가 어떤 결과를 낳으리라고 예상 했을까?
최소한 아합이 놀라거나. 회개하는 시늉이라고 할 것은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3절)
숨어라니... 이것은 엘리야의 예상했던 시나리오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아마도 엘리야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특별히 이세벨이라는 거센 여자로부터 엘리야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하나님의 용감한 선지자 엘리야에게 이것을 얼마나 계획과는 다른 명령이었을까?
학사가 되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우리의 시나리오와는 너무나 다르게 펼쳐지는 삶의 모습들이다.
아무도 없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까마귀가 갔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고.
시냇물을 마시면서 며칠을 보내게 된다. 이게 뭔가.. 하나님의 선지자가..
내가 멀 할 수 있을까?.. 이런 그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시냇물이 점점 말라 간다는 것이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힘들어도.. 저는 살려 주셔야죠.
저까지 포함시키십니까?
당황한 엘리야의 부르짖음이 입밖으로 새어 나올 즈음에.. 하나님은 또 다른 길로 인도하신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9절)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이건 또 뭔가? 하나님 왜 이러시나요..
시돈에 속한 사르밧이라구요?
이곳은 이세벨의 앞마당이다. 이세벨이 자란 곳이다. 
바알 숭배의 본거지이다.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라니. 이건 뭐하는 시츄에이션인가? 
그것도 과부의 집으로 가라니.. 엘리야가 결혼을 했는지 안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선지자와 과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더더욱 대부분의 과부들은 가난했다. 하필이면 왜 이렇게 가난한 집으로....
그래도 그는 터벅 터벅 걸어서 사르밧으로 간다.
도착해서 한 과부를 만난다.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 마음이 더욱 더 답답해 진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난하다.
떡을 달라니. 한번 먹고 죽을 거 밖에 없단다. 엘리야는 그거라도 달라고 한다. 그 여인의 믿음에 찬 행동으로 그나마 먹고 살게 된다. 결코 풍족한 삶이 아니다. 매일 매일, 한끼 한끼 먹고 사는 것이다. 이러고 앉아 있을 때, 엘리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선지잔대. 아합과 이세벨을 상대해야 하는 선지자인데. 이스라엘을 이방 종교에서 돌이킬 선지잔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엘리야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거의 3년에 가까운 세월을..)
나중을 대비해서 목소리를 다듬고 있었을까? 40일씩 금식하며 영성을 쌓고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냥 상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과부의 하나뿐인 아들이 죽는다. 그리고 과부는 엘리야를 원망하게 된다. 겨우 겨우 살려 주시더니 왜 죽이시는가? 엘리야는 자신의 시나리오와는 전혀 다른 삶으로 이끌림을 받는다.
학사의 삶은 우리가 계획하는 삶의 시나리오와는 너무나 다른 일들의 연속이다.
학사의 삶은 학생때 꿈꾸던 삶과는 너무나 다른 삶이다.
우리의 삶은 뒤엉키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각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소망을 가지고 졸업하지만 취직이 안될 때.
취직을 해서 열심히 생활하려는 데 직장이 문을 닫을 때.
직장 생활은 재미 있는데, 같이 일하는 동료가 나를 괴롭힐 때.
예상지 않은 임신,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하는 혼란스러움. 아이가 병을 가지고 태어났을 때.
이런 우리의 모습이 바로 엘리야의 모습이다.
이런 삶이 우리에게 괴로운 것은 하나님의 손길과 임재를 발견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학생 시절과 다르게, 뒤엉킨 삶으로 인해, 너무나 일상적인 삶의 반복 속에서 하나님을 놓치기 쉽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며, 어떻게 일하는 지를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다.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인도가 멀게만 느껴지게 된다.

믿음으로 사는 삶. - 하나님 발견하기.
엘리야에게는 아합왕 앞, 그릿 시냇가, 과부의 집이 모두 다른 상황이다.
학생때의 상황과 학사들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학사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달라진 상황에서 하나님 발견하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 아합왕 앞에서도, 그릿 시냇가에서도, 과부의 집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며, 일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학생때의 상황. 수련회, 질서 정연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는 어느 정도 익숙해 졌다.
그러나 학사들의 상황, 우리의 의도와는 다른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일상이 계속되고, 변화가 없는 일상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런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훈련을 시키신다.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다.(6절)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으로 엘리야를 먹이신다.
이 장면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는 이스라엘과 겹쳐진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겹쳐진다.
엘리야가 과부의 집에 있을 때에도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16절)
엘리야는 거대한 일을 기대했다.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임재를 나타내신다.
한 끼의 식사를 할 때마다 함께 하시며,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매 끼의 식사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리다.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일터 가정 이웃 그리고 평범한 부엌 식탁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우리는 왜 먹는가? 우리는 만족을 위해서, 또한 사역을 위해서 먹는다.
먹기는 하나님을 만나는 성례와 같다. 각 식사는 성육신, 즉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셔서,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오셨다는 소식이다. 각 식사는 구속을 암시한다. 우리가 식탁에서 서로 환영할 때 하나님의 환대가 보이고, 또 놀랍게도 우리가 주는 대로 환영받는 경험을 한다. 자기가 베푸는 것을 받는다. 우리의 먹기는 예언과 같다. 식사를 할 때마다 우리의 관심은 미래를 향하게 되고, 인간의 역사 전체가 고대하는 최종 종착지를 기대하게 된다.
식사는 영원할 향한 창이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폴 스티븐스. 내이름은 야곱입니다. 2장 먹기.)
한 끼의 식사를 앞에 두고 감격하는 훈련을 하자. 하나님을 발견하는 훈련을 하자.
요한 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 부터 온 양식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한다. 하늘 양식을 매일 먹는 것이 경건의 시간이다.
학사로서 살면서 경건의 시간은 어렵다. 여러가지 이유로 어렵다. 그럴지라도 경건의 시간이 우리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학사로서 살 때는 많은 말씀보다, 한 두 구절의 말씀을 품고 오랜 시간 인내하며 열매 맺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매일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함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훈련을 하고, 그 말씀을 먹고 사는 훈련을 할 때, 우리는 가장 일상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일하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을 통해서 죽음의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
과부의 절규를 통해서 죽음이 가져오는 고통을 맛보게 된다.
우리가 사는 시대 역시 죽음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죽음으로 부터 시작된 불안, 두려움이 가득한 시대다.
엘리야는 이 시대에 부활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증거한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해야 할 삶의 증언이 바로 부활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참 소망이신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을 우리가 품고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없는 사람처럼(과부처럼) 두려워 하지 말자.
부활이며, 소망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증언(말로, 삶으로)하며 살자.

이런 삶을 살 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장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증언할 때.
과부가 엘리야에게 한 고백을 우리도 듣게 될 것이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우리 학사들의 삶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풍성해지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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