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시다

내가 쓴 글들

by 거룩한나그네 2011. 2. 9. 22:36

본문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계시의 종교’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대부분이 사람들의 추구와 발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과 믿음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이런 특성은 인간의 이성적 추구와 여러 가지 면에서 부딫히게 된다. 인간은 항상 이성의 한계 내에서 이해하고 인간의 언어로 그것을 말할 수 있기를 추구한다. 종교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동일한 태도를 가지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에 이르면 우리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로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우리가 지금 다루려고 하는 부분도 이런 신비와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만 이것을 우리의 언어로 설명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삼위 가운데 한 분이신 예수님을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교회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자신의 말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이 어떨 때는 성경의 진리를 벗어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통해 그 진리를 바로잡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나마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보게 된다. 여기서는 그 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문제제기 : 예수님은 없었던 적이 있다 ; 아리우스

초대 교회에서 문제의 제기는 아리우스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리우스는 원래 알렉산드리아의 장로로서 성공적인 설교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초월성을 너무 강조하였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한 자존자로서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신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리우스는 성자의 자존성과 영원성을 부인하였다. 

성자는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기원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성자의 선재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성자는 세상 이전에 시간을 초월하여 태어났다. 그렇지만 성자는 없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자가 나기 전 혹은 피조되기 전 혹은 결정되기 전 혹은 성립되기 전에 성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자는 성부의 의지에 따라서 존재하게 되었으며, 성부로부터 생명과 존재와 다양한 종류의 영광을 받았으며, 이는 성부가 성자에게 자기 자신과 더불어서 존재를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아리우스는 성자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성자도 피조물이며, 성부는 창조주였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 역시 철저한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에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는 본질의 면에서 전적으로 서로 다르다. 

아리우스는 성자를 피조물이며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성자는 본질에서 성부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성부가 그를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면, 성자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는 다른 모든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흔들릴 수 있으며 변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반대자들이 그런 성자를 예배할 수 있느냐는 반론을 제기하면서 피조물에 대한 예배는 불 경건이지 않느냐고 말하자. 아리우스는 성자가 평범한 피조물은 아니라고 말한다. 성자는 하나님이 그를 도구를 해서 그를 통하여 우리를 창조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지음 받은 특별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성자는 피조 되었지만 장엄한 존재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의 성경적인 지지를 히브리서 1;2의 ....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라는 구절에서 찾고 있다.


호모우시우스 :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시다.

이런 아리우스의 주장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알렉산더가 즉각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문제 제기의 해결을 위해서 325년에 니케아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알렉산더의 후계자였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서 문제가 제기 되고, 그의 활약으로 니케아 신조를 채택 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가지 우여 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이 니케아 신조가 공교회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이 되었고 이 신조의 설명이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임이 드러났다.

이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신조중에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 나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셨으며 하나님의 하나님이요, 빛의 빛이시요,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나셨으나 지으심을 받지 않으셨으며,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와 한 본체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는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시어서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는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되셨다가 사흘 만에 성경말씀대로 부활하셨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영광중에 다시 오셔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 하실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이 고백에서 가장 핵심적이며 중요한 단어는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이다. 그 뜻은 본질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담는 말로 예수님과 하나님이 동일본질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말의 중요성은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 이라고 가정해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었다.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구속을 받지 않았다.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연합되지 않은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예배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예배한다고 한다면,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이교적인 미신과 우상 숭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로 사용된 말인가 ?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이 말에 함축된 의미가 이중적이라고 말한다.

‘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진술의 함축된 의미는 이중적인 것이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지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중요성을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이차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개념에 강력한 도전을 제기하였다.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존재로 인정된다면 하나님에 관한 전체 교리는 이러한 믿음에 비추어서 

재검토되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적인 발전은 교회 내에 그리스도론적인 합의의 출현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합의되고 보증된 출발점으로 인정될 수 있 을 때에야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신학적 사색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 실질적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 이 말은 먼저는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또한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먼저 이 말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에 따라 파생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이 말은 성자가 구별된 한 위격임을 확언한다. 

니케아 신조는 성부와 성자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성자를 성부에게서 낳아졌으며,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며, 빛에게서 나온 빛이며,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이라고 묘사한다. 


터툴리안으로 대표되는 라틴신학은 위격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사이의 구별됨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은 본질상 한 분이지만 위격 상으로는 셋이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사이에 실질적인 위격상의 구별이 있다고 인정할 경우, 

제기 되는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 아들 됨이 영원한 것이냐 아니면 역사 속에 나타났던 때의 일시적인 것이냐 것과 여기에 따르는 논리적 결과가 영원한 나심이라는 문제이다.

아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의 아들 됨보다는 그의 영원한 선재하심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그가 아들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그가 성부보다 이후에 존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서 그가 시간 내에서 지음 받은 피조물이며 무에서 지음 받은 자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항해서 니케아 신조는 성자가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낳아졌으며, 낳음을 받되 성부의 본질에서 낳음을 받았으며 그가 낳음 받은 유일한 자이며 그가 모든 시대 이전에 낳아졌다고 주장했다. 니케아신조는 성자의 선재성을 분명히 인정한다. 그러면 그가 아들로서도 영원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신학자들이 생겨났다.

‘ 영원히 그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성육신하면서만 아들이 되었다..... 그는 항상 하나님에게 복중하며, 항상 하나님보다 못하며, 항상 하나님 아래 있는 영원한 아들이 아니다. 아들됨은 성부에 대한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관계와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성부에게 그가 기꺼이 드린 복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종의 유비다. 그의 아들됨은 시간상의 한 점에서 시작된 것이지 영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아들로서의 그의 삶은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다. ’

이러한 입장은 그리스도의 선재하심과 영원성, 신성을 열정적으로 믿지만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이런 입장이 가져오는 심각한 결과를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영원한 아들됨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척도를 상실하게 된다. 

요한 복음 3;16절이 가지는 힘은 그리스도가 가지는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유일무이한 아들을 주심이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는 영원한 아들됨이 없이는 동일 본질이라는 말을 이해하거나 방어하는데 훨씬 더 어려움이 많다. 실제로 아타나시우스는 아들됨과 동일본질을 구체적으로 연결시킨다. “성자를 소생으로 여기는 사람은 누구나 당연히 그를 동일 본질로 여긴다 ”성자가 단순한 피조물일 가능성을 배제시켜 주는 것도 영원한 아들됨이다. 

사실상 영원한 아들됨이 없다면 니케아 신조에서 낳았다거나 지음받지 않았다는 표현을 아예 버려야 한다. 

셋째 영원한 아들됨이 없이는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한 위격과 다른 위격을 구별해주는 속성을 상실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들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으셨으므로 아들인가 ? 이 말은 다시 아리우스의 말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니케가 신조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나으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말에 대해서 아타나시우스는 우리가 알수 없다고 말한다.

‘ 또한 하나님이 어떻게 낳으시며, 하나님의 낳는 방식은 무엇인지를 ... 찾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사람은 그러한 사항들을 추구하는 일을 제쳐 두어야 한다. 형언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본성에만 고유하고 그에게만 알려져 있고, 그 아들에게만 알려져 있는 그러한 것을, 

사람은 말로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당혹스럽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보다는 당혹 스러운 가운데서도 침묵하고 믿는 것이 더 좋다.’

많은 학자들이 이 ‘하나님에게서 나신 성자’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전혀 아무말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종종 이것을 소극적인 방식으로 말해 왔다. 즉 적극적인 설명보다는 무엇이 아닌지, 어떤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지 울타리를 치는 정도에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는 신적 나심이 인간의 낳음이라는 맥락에서는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낳음은 기원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 말은 무기원적이라는 말이다. 세 번째는 나심이라는 단어가 성자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성령은 성부와 동일본질이면서도 나오심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구분해서 성자는 나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네 번째로 낳아짐과 만들어짐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있다. 성자는 하나님의 소생이지만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다. 아타나시우스의 말로 하면 그는 피조물이나 작품이 아니라 성부의 본성에 고유한 소생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동일본질인 성자는 실제적으로 성부의 아들이지만 어떻게 아들이 되시는 지는 이 정도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함축한 의미는 성자가 성부와 본질상 동일하다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질문한다. 성부와 성자는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인가 ? 니케아 신조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렇다.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본성을 공유하였다

이것이 니케아 신조가 고백하는 “ 그리스도는 빛에서 나온 빛이며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이다.”라는 구절의 의미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이라는 본성에서 동일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본성을 충분히 공유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한 3차 설교’에서 아주 강하게 이점을 말한다. 

‘그는 하나님과 동일하다. 그도 성부도 본성의 특성과 특징상으로 그리고 이미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한 분 신성의 동일성 안에서 하나이다. 마치 광선이 태양 다음으로 가는 빛도 아니며 다른 빛도 아니며 그 태양에 참여해서 온 것이 아니라 태양의 온전하며 고유한 소생이듯이 그렇게 성자의 신성도 아버지의 신성이다. ’ 라고 말했다. 삼위일체의 정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어거스틴은 이것의 증거를 요한복음 10;30절에 함축되어 있다고 말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이 바로 본질상 동일하다는 의미 인 것이다.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은 속성상의 동일성 뿐 아니라 수적인 동일성도 가리킨다. 

성부와 성자는 속성상의 동일성에 의해서 연결된 두 존재가 아니라 한 존재이며 한 분 하나님이다. 이 한 존재안에 세 독자성 혹은 세 존재 양식 혹은 세 관계 형태가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신적 본질이 성부안에 그리고 성자안에 그리고 성령안에 충만히 현존하고 있는 그러한 것이다. 그 셋을 더해도 한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한분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세 독자성, 세 위격이시다. 이것은 교회가 가진 최대의 신비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혹은 인간의 경험의 어떤 유비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도 거의 혹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이것을 설명하려고 어떤 유비를 사용하고자 말할 때 삼위하나님은 그 한계를 넘어서 계신다.

그렇다고 침묵할 수만은 없지 않는가 ?

그래서 교회는 요한복음 14;11절에 나오는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라는 말에서 단서를 얻어서 상호점유 혹은 속성들의 교통(교제)이라는 사상을 형성했다. 이러한 사상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고전적인 진술을 제시한 사람이 다마스쿠의 요한이다.

‘ 독자적 존속(위격)들은 서로 안에서 거주하며 서로 안에서 확실하게 성립된다. 이는 그들이 서로 분리될수 없으며 서로에게서 나뉠 수 없으나 서로 안에서 융합이나 뒤섞임 없이 그들의 분리된 길을 지켜서 서로간에 한 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자는 성부와 성령안에 있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안에 있고, 성부는 성자와 성령안에 있다. 그러나 융합이나 뒤섞임이나 

혼란은 전혀 없다. 그리고 하나의 동일한 운동이 있다. 이는 세 독자적 존속들에 속하는 하나의 맥박과 하나의 운동이기 때문인데, 이러한 것은 어떤 피조된 본성에게서도 관찰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설명으로 다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안에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을 각각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를 향해 숙이시는 하나님의 겸손하심이다. 하나님은 한 분으로서 우리를 향하여 오신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오시는 한 분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 한 분안에 셋이 오시며 각자 안에서 다른 이가 오신다. 하지만 각 위격에 대해서 다른 위격과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문제제기 ; 예수님은 참 사람인가 ? 

예수님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있고 나서 두 번째 문제 제기가 있었다.

그러면 그 참 하나님이 참 사람이 될 수 있냐는 것이다. 공격은 두 곳으로부터 왔다.

하나는 가현설이라는 좀더 포괄적인 가르침이 기독교에 유입되면서 이루어 졌고, 

또 하나의 공격은 아폴리나리우스주의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이런 생각은 인간의 이성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성에는 매우 설득력을 가진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들은 긴 생명력을 가지고 재기하곤 한다.


가현설 

가현설은 물질은 악하다는것과 신은 결코 변화나 고통을 경험할 수 없다는 두 가지 근본적인 원칙에 기초했다. 이 두가지 원칙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소중한 내용들을 부인할 것을 명백하게 요구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을 어머니로 해서 태어날 수 없고, 탯줄을 통해서 그 어머니와 연결될 수 없으며, 고난당하고 죽을 수도 없었다. 예를 들어 케린투스는 그리스도와 예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어 구별하였다. 예수는 마리아에게서 보통 방식으로 태어나서 육적인 몸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갈보리의 십자가에 못박힌 보통 인간이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천상적 존재로서 세례시에 예수 위에 내려와서 십자가형을 당하기 전에 그를 떠났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키온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단지 허상으로 간주하였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외양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은 그저 가면으로서 실체가 없는 이미지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육체는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십자가와 부활을 무효화 시킨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 : 육체는 인간, 영혼은 하나님

아폴리나리우스는 니케아 신학의 뛰어난 주창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 그는 참된 교리를 위협하는 적이 되었다.아폴리나리우스는 성육하신 로고스는 사람의 지성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술은 오로지 그가 사람의 몸을 취하셨음을 의미할 뿐이다. 성육하신 그리스도는 지성이나 인간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가 비록 사람같았지만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요소에서 사람과 동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가르침들에 대항하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라는 고백들을 하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 : 두 영혼을 가진 예수님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라면 두 본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라는 물음과 이를 둘러싼 논쟁이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신성은 분리된 위격들 혹은 행위 주체들을 대표하는가 ?

두 본성은 한 위격안에서 뒤섞이거나 혼합되어 있는가 ? 아니면 그 두 본성은 서로 합쳐져서 사람도 하나님도 아닌 제 3의 종류가 되었는가 ?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인성을 그의 신성과 구분했는데 중보자가 한 쪽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다른 한 쪽으로는 사람의 아들로 구분되어 있는 두개의 분리된 위격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로 구분을 강조했다.

이러한 구분을 하게 된 배경은 마리아 숭배 때문이었다. 

4세기 말경에 교회에서는 다음의 명제가 널리 인정되었다.

1. 예수는 전적인 사람이다

2. 예수는 전적인 하나님이다

만약 이 두 진술들이 사실이라면 예수의 인성에도 해당되는 것은 그의 신성에도 해당되어야 하며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주장되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예가 등장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

마리아는 예수를 낳았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님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이런 생각들에 반대하면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했고, 인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는 ‘그가 성육신 후에 하나님과 사람이신 그리스도안에 하나의 통일된 존재가 아니라 두개의 구별된 주체 혹은 행위자들이 서로 손을 잡고서 점차적인 파트너쉽 혹은 협력을(종과주인으로서)이루어 나갔다고 믿었다. 


단성론 ; 시릴과 유티케스

이와 반대편에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유티케스였다.

그의 핵심적인 주장은 연합이전에는 두개의 본성이 있었지만 그 후에는 하나의 본성만 있었다는 취지의 말이다. 유티케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성육신 상태에서는 인성에 완전히 융합되었다고 믿었다. 이후에 유티케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좀더 철저한 단성론자들이 되어서, 두 본성의 연합은 인성도 신성도 아닌 제3의 종류를 형성한 혼합을 초래 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시릴은 영,육 모두 다 신인적이다. 육체도 영혼도 신인으로 혼합된 단일 개체로 이해했다. 

이런 두 진술은 모두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거부를 명백하게 함축하고 있었다.


칼케돈 : 예수님은 참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이런 논쟁에 종지를 찍은 것이 칼케돈에서 고백한 신조이다.

칼케돈 신조는 그리스도의 단일 위격성과 그의 인성과 신성 두 본성의 진정성과 완전함을 

적극적으로 확언하였다.

“ 우리는 모두 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의 동일한 아들이시고, 신성에 있어서 똑같이 완전하시고 인성에 있어서 똑같이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사람이시니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시며 신성에 있어서 

성부와 한 본질이시고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한 본질이시니 죄만 빼놓고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와 마찬가지이시다.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영세전에 성부에게서 때어나시고 

마지막날에 동일한 분이 그 분의 인성에 있어서 우리들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을 낳은 분이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한 분의 동일한 그리스도시요, 아들이시요, 

주님이시며 독생자이시며 두 본성으로 알려지셨으나 혼동도 없고 변화도 없고 분할도 없고 

분리도 없으시며 본성들의 차이은 결코 연합 때문에 제거되지 않으나 각 본성의 특징은 그대로 보존되고 하나의 프로소폰과 하나니의 본체로 합체되었다. 두개의 프로소파로 나뉘거나 분할되 지 않고 한 분의 동일한 아들이시고 독생하신 신적인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옛날의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분에 대해 가르치시고 우리 교부들의 신조가 전해준 그래로시다 ...


칼케돈 신조는 누가 성육신 하셨는지를 분명히 한다. 누가 육체가 되셨는가 ?

“신성에 있어서 똑같이 완전하시고 인성에 있어서 똑같이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사람이시니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시며 신성에 있어서 성부와 한 본질이시고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한 본질이시니” 

성자 하나님이 참으로 인간이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안에 거하신 것이다(요1;14절)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 이것은 성자 하나님이 어떤 변화를 경험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아들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신이었으며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소유했으며 하나님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모든 대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에 의한 신성의 포기를 포함하지 않는다. 성육신에서 하나님은 한 사람으로 변화해 버리신 것이 아니다. .. 모든 것은 이 역사를 행하실 때 그는 항상 계신 그대 로의 일자이시며 그가 하나님이시기를 그치지 않고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시며, 하나님으로서 사람이시라는 사실에 달려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전혀 새로운 경험과 관계의 범위에 들어가신다는 의미에서의 변화이다. 그는 한 인간의 몸 안에서 그리고 한 인간의 영혼안에서 삶을 경험하신다.

칼케돈 신조에서는 ‘테오토코스’라는 말을 인정한다.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테오토코스’(하나님을 낳으신)이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테오토코스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을 밴 자 라는 뜻이다. 이 용어에서 중요한 진리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그 위격의 신적 신원이다. 그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누가복음 1;35절에서 나실 바 그 거룩한 이는 하나님아들이라고 일컬으리라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이 용어가 자칫 마리아 숭배로 빠질 위험이 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하는 용어이다.

그러면 칼케돈이 분명히 천명한 두 본성의 연합이라는 것은 무슨뜻인가 ?

“위격적 연합이라는 용어는 세가지 진리를 담고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가 한 위격이시며, 둘째로 그의 두 본성 사이의 연합은 두 본성이 단 하나의 동일 위격에 공히 속한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며, 셋째로 이 한 위격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의 모든 행위 배후에 있는 행위주체이며 그의 모든 발언이 속하는 화자이며 그의 모든 경험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 마지막 강조점은 신약성경의 가르침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처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이 하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분이시다. 이런 가르침은 성경곳곳에서 동일하게 보여진다.

그분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존재에 그의 신적 존재를 더하시며 인간경험에 그의 신적 경험을 더 하신다. 그분안에서 하나님은 참된 인간 현존으로 사신다. 이것이 성육신이라는 기적의 핵심이다. 

위격적 교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속성간의 교류사상이다. 

인성과 신성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본성간의 교통’이 있다는 믿음이다.

이 두 본성은 융합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아무런 접촉이라 상호작용 없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것도 아니다. 

칼케돈이 진술한 교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힘들다. 그래도 한 마디로 하자면 ‘한 위격내의 두 본성’이다. 

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나 인간의 언어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분명해지는 진리들이 있다.

1세기에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이 그분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삼위중 성자가 인간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또한 그 분은 참 하나님일 뿐 아니라 참 사람이 되셨다. 참 사람이 되신 그분은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가지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

이런 과정을 따라 가면서 확실한 것은 다원화된 세상 속에서도 유일한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역시 진리이다. 그분은 자신을 일컬어 하나님에게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자신만이 생명을 주는 유일한 분이라고 말씀하셨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이 다원화 된 세상속에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고백속에서 이 진리를 더 구체화 하고 명확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을 불신자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용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도 여전히 신비인 이 진리를 어떻게 불신자들에게 말할 것인가 ?

이것이 우리가 사는 시대에 과제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가지신 예수님

하나님이시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체휼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우리가 해야 할 과제라는 생각인 든다

두 번째는 하나님앞에 사는 우리의 자세이다.

우리의 추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또한 주께서 계시하신 성경을 다 안다 해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 알게 된것이다.

성경도 다 알지 못하는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믿고 인간의 능력을 믿으라는 부추김 속에 끊임없이 교만해져왔다.

이런 우리의 교만함을 꺾고 겸손히 하나님앞에 무릎꿇게 되는 것은 이런 광대하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될 때이다.

우리의 머리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한다 해도, 우리가 가진 모든 언어를 다 동원한다 해도 

하나님의 모습과 본질을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을까 ?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 하나님을 인간 차원 속의 왜소한 하나님으로 만들고, 우리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개념으로 그분을 표현하고 싶은 끈질긴 유혹은 여전하다. 인간의 이성은 모든 것을 이해하여 자신의 용어로 환원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보다 더 날카로운 지적능력과 더 큰 사랑의 능력을 지닌 어떤 초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고 스스로 존재하시며, 무한하신 분이고, 우리에게 절대 타자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생각과 사고와 기대를 훨씬 넘어서 초월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가 머리로 생각하거나 그릴 수 있는모든 것 너머에 계신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신다. 인간의 짧은 생각으로는 그분을 파악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 자리에서야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파악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하던 서방 전통을 유보하고 동방 전통속에 설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경험한다.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찬양하며 태도가 있어야 겠다.



참고도서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