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은 한 세대의 마지막임과 동시에 또 다른 세대의 시작이 된다. 그는 고대 교부들의 맨 마지막이며, 동시에 중세신학의 선구자이다.고대 신학의 주류가 어그스틴에게서 합류되었다가, 그에게서 중세 스콜라주의의 강물뿐만 아니라 16세기 개신교 신학의 강물까지 도도하게 흘러내려온다.” 는 말로 어거스틴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중요성 만큼이나 그의 저작이나 사상은 방대하다. 이런 그의 사상을 후스토 곤잘레스가 정리한 몇가지 범주를 따라가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어거스틴의 저작은 일반적으로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그가 주로 대적했던 사상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첫 번째 대적은 마니교였다. 자신이 한 때 속해있었던, 그래서 더욱 기독교에 미치는 해악을 잘 알았던 마니교를 논박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두 번째 시기는 도나투스 분파들과 싸웠다. 이들과의 대적에서는 3가지 중요한 주제가 거론되었다. 즉 교회의 본질,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그리고 성례전에 대한 논쟁이다.
도나투스주의는 경험적인 거룩성에 근거하고 있다. 이들의 출발이 박해에 대한 태도 때문에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거룩성도 박해기간의 태도에 달린 것으로 보았다.
이것에 맞서서 어거스틴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세 번째 시기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 대해서 관심을 쏟았다.
이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은총론과 예정론을 확립시켰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인간은 이 자유를 통해서 선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창조시부터 인간에게 있으며 아담의 죄나 마귀까지도 이 능력을 파괴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원죄를 거부하고, 원죄에 의한 전 인류의 죄에 대해서도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인간은 그의 능력으로 죄와 싸워 이길수 있다고 말했다. 펠라기우스가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가장 충실하게 따른 것이 코일레스티우스이다. 그의 사상은 어거스틴이 9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1. 아담은 처음부터 죽을 수 밖에 없는 숙명적인 인간으로 피조되었기 때문에, 죄를 짓고 안 짓고에 관계없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2. 아담의 죄는 그 자신에게만 손상을 입혔을 뿐이며 전 인류를 손상시키지 않았다.
3. 율법도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늘나라로 이끌어 준다.
4. 그리스도 이전에도 죄 없이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5. 최근에 태어난 갓난아이는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와 동일하다.
6. 전 인류는 아담의 타락과 죽음으로 인해서 죽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서 부할되지도 않는다.
7. 사람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죄없이도 살 수 있다.
8. 세례받지 않은 유아들이라도 영생을 얻는다
9. 세례를 받은 부자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소유한 재산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런 공로가 없으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도 못한다.
이런 잘못된 사상에 대항해서 어거스틴은 성경적인 가르침들을 정리하고 강력하게 가르치게 된다.
1. 삼위로서의 하나님
1-1.삼위의 동일본질
삼위는 나누어질 수 없는 동등한 한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 니케아 신조의 고백처럼 삼위는 동일한 본질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이 본질 자체는 한 하나님으로서 불멸, 불가견적이라, 항상 계시는 자는 불멸의 분질을 소유하므로 이것을 "우시아"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성부와 성자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 본질이 동일하므로 동등할 수밖에 없다. 그는 성자의 완전한 "나심"과 곧 신성의 중간이 없는 발생(generatio)을 말하면서 낳으신 성부와 나신 성자의 완전한 동등을 강조하므로 유출설과 다르다. 성령도 성부와 성자에게서 보냄을 입었으므로 이에 못지 않다. 더욱이 어거스틴은 삼위가 다 볼수 있는 피조물을 통해서 특별한 계시 곧 신현(theophanie)의 가능성 및 그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서로 동등임을 주장한다. 이것이 획기적인 사상이다. 이로써 그는 plotinus의 유출설, 노스틱주의의 이원론, 아리우스주의의 종속설 등을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1-2. 삼위의 구별
"사벨리안"의 양태론은 삼위의 구별을 무시했으나 어거스틴은 이에 대항하여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며,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니다. 이들은 확실히 구분된다. 본질은 같으나 관계는 다르다. "성부는 성자를 갖지 않고는 아버지가 아니고, 아들은 성부를 갖지 않고는 아들이 아니다" 동일한 본질이신 하나님이 또한 셋으로 구분된다. 어떻게 구분되는 지는 오랫동안 토론되어왔던 내용이다. 어거스틴은 관계를 통해서 구분된다고 말했다.
삼위를 구분하는 용어로 오랫동안 성자는 나심이며 성령은 나오심이라고 구분했다. 삼위는 모두 영원전부터 계셨지만 그안에 서로간의 관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을 가르는 중요한 이론을 제시하게 된다.
그것은 성령의 이중발현을 말한 것이다.
동방신학은 성령이 성부로부터 나오심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심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서방신학이 성자의 통제를 받는 성령론을 가지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1-3. 삼위에 대한 성서적 논거
성부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신명기 6장 4절을 인용하면서 아들이나 성령이 제외되지 않는 한, 역시 성부가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한다. 어거스틴은 아버지란 말은 삼위일체 안에 있어서 신이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양식에 적용된 관계개념이라고 한다. 즉 신은 본래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라는 3者가 상호간에 가지는 불가분리의 관계 안에서 존립하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성부만 불가견이 아니고 삼위가 다 불멸이며 불가견이라 한 것은 종래의 사상 곧 성부만이 불멸, 불가견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수정한 것이다.
성자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골로새서 2장 9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본성을 완전히 반영하고 있는 거울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지혜 자체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무한한 본성을 자기 안에 소유하시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아들은 아버지의 지혜요 능력인 것처럼, 성부의 신성이다. 특히 어거스틴의 그리스도론의 한가지 특징은 그의 Forma Dei 사상이다. 그는 성자의 二성을 비추어 두 가지 형상을 인정하고 성자의 형이상학적 면을 Forma Dei라 부르고 그의 인간적 존재 양식을 Forma Serv(종의 현상)라 부른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즉 그분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존재하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가장 깊은 본질은 신적인 것이다. 성자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아버지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일에 있어서 성부와 동등이며, 신에게 있어서 나온 신이요, 본질 중의 본질이며, 성부와 동등이면서도 성부가 아니다. 그는 성부로부터 전적으로 나셨고, 모든 것을 그대로 가진다.
성령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성자가 성부와 모든 면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도 그의 본체(substantia)에 있어서나 기능에 있어서나 성부와 완전히 동일하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셨고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을 보내신 고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못지 않게 동등하다. 어거스틴은 성서가 한번도 성령을 사랑이라고 부른 곳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요한 1서 4장 13절과 4장 16절에 근거하여 신자 안에서 신의 사랑을 북돋우어 주는 자는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성령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한다.
1-4. 삼위일체론의 흔적들
1) 외적 사람에 있어서의 삼위일체론의 흔적
어거스틴은 논하기를 삼위일체의 지식이 참으로 도달하는 길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세 가지를 암시하는데 실은 사랑 그 자체 안에 삼위일체의 흔적이 있다. 사랑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사랑으로 어떤 것이 사랑을 받는다. 그리하여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과 그리고 사랑 이 세 가지가 있게 된다. 사랑이라는 것은 두 가지의 것, 즉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을 받는 객체와 그 양자를 연합시키거나 혹은 연합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랑으로 분석함으로써 드러난 것이다. 사랑하는 성부, 사랑을 받는 성자,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사랑의 성령의 흔적이 사랑의 구조 안에도 남아 있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흔적을 외부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원리는 첫째 것이 둘째 것을 낳고 셋째 것이 그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비를 통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계시하시도록 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한계를 가지므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항상 한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날이 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처럼 삼위하나님을 환히 알게 될 것이다.
2) 내적 사람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론의 형상(Imago)
어거스틴은 인간의 내적 활동을 중시한다.
이 내적활동의 핵심인 영혼의 자리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기 때문이다.
이 영혼의 활동을 관찰함으로 어거스틴은 삼위하나님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존재(esse), 지득(nosse), 의욕(velle)
나는 알고 또 의지하는 자로서 존재하고, 자기가 존재하고 또 의지하는 것을 알고, 또 존재하고 아는 것을 의지한다. 즉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존재가 반드시 무엇을 알며 또한 알려고 의욕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속아서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 당시 회의주의를 주장하는 아카데미학파를 논박하면서 속임을 당하고 있다는 나의 존재는 틀림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는 사실이므로 존재하는 내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상에서 말한 esse, nosse, velle는 그것이 그대로 곧 삼위일체론적 존재 양식에 직결되는 형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것이 삼위일체론의 흔적임에 틀림없다.
- 마음(mens), 지식(notitia), 사랑(amor)
사람의 마음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가장 잘 찾을 수 있다. 즉 마음과 그 마음자체를 아는 지식 그리고 그 마음 자체를 사랑하며 또 그 자체의 지식을 사랑하는 사랑, 이 세가지는 하나이며 다 같으며 나눠질 수 없고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이 세가지는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다든가 경한 것이 아니라 다같이 중요성을 갖는다. 그가 삼위일체의 흔적을 먼저 인간의 마음속에서 찾는 이유는 사람이 신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실에 두었고 또 인간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인식하며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알려 진다는 사실에 두었다. 곧 마음, 지식, 사랑은 삼위일체의 흔적이다.
-기억(memaria), 이해(intelligentia), 의지(voluntas)
신앙으로 시작하며 이성의 힘으로 전진하여 '하나님을 봄'(visio dei)에 이른다는 어거스틴의 확신은 그의 일생 동안 변함이 없다. 삼위일체 신에 대한 지식에 이르기 위하여 인간 영혼에 있어서 삼위일체를 연구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자 열심히 공부할 때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과 이로써 바라던 지식을 소유하게 되고 안 후에는 이것을 이용코자 한다. 여기서 능력, 지식, 이용은 셋이나 한 마음의 작용으로 일체를 이루므로 삼위일체의 흔적이 엿보인다. 끝으로 어거스틴은 그의 삼위일체론의 유비와 흔적과 형상을 자연과 인간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후에 고백하기를 이와 같은 유사성이 피조물의 세계에서 발견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사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2. 창조와 악에 대해서
삼위 하나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만물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셨다. 어거스틴의 창조론을 흔히 “모범설”이라고 본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기 전에 자신의 이성속에 영원전부터 만물이 존재했다. 이 이성은 삼위의 제2격인 말씀인데, 이 생각들이 피조세계의 기원이 된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창조의 질서에 관해서 어거스틴은 만물이 한꺼번에 창죄된 것인지 아니면 단계적인 순서에 따라서 창조된 것인지 스스로 자문해 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거스틴은 씨앗이성을 빌려온다. 씨앗이성들이란 하나님이 창조의 첫날 이래로 창조하신 발전들의 원리들인 바 이 원리들이 원속해지기 위해서는 각 씨앗이성들이 한 종의 첫 번째 지체 혹은 지체들을 생산하며 이 지체가 자연적인 방법으로 번식해 나갈 때에 한해서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만물을 첫날에 다 만드셨으나, 만물은 시간이 지날때까지 각 종으로 확연하게 나타나지 못했으니, 이러한 사실은 창세기가 자세히 보여준다. 어쨌든지6일동안의 창조란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태초에는 밤과 낮을 구별할 수 있는 태양이나 다른 천체의 별들도 없었기 때문이다. 6일이라는 날짜의 의미는 상징적인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와 더불어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하나는 시간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악의 문제이다.
시간과 창조의 관계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이 시간을 창조하셨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는 질문으로 집약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시간을 창조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영원하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면, 악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 악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는가 ?
악은 자연도 아니고 존재하는 어떤 것도 아니고 피조물도 아니다. 악은 다만 선의 부정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정한 크기와 아름다움과 질서를 갖는 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선하다. 이런 선의 결핍이 악이다. 이런 면에서 악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를 따른다. 신 플라톤주의에서는 악을 일자와 별개로 있는 또 다른 실재로 보지 않고, 일자로부터 멀어져 있는 존재로 간주한다.
2. 자유의지에 대해서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 악은 하나님이 이성적 본성을 부여하셔서 창조한 피조물의 자유의지로부터 온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부여받았다. 이 자유의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합리적인 존재가 지닌 특징이므로 선한 것이다. 그렇지만 자유의지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동시에 택할 수 있기 때문에 중간적 선이다.
따라서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좋은 선물로서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며 그 자체로는 결코 악하지 않으나 악으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3. 원죄와 은혜에 대해서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의 후손들은 전체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완전한 의지의 자유를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어거스틴이 아담이 원죄를 후손들에게 상속으로 물려주어서 유전된다고 생각했다.
타락이전의 아담은 여러 가지 선물을 가지고 있었다.
즉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동시에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아담의 죄악의 핵심은 교만과 불순종이다. 이 죄악의 결과로 아담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가능성과 그의 특별한 지식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타락후에도 여전히 자유로왔으나 아담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는 은총을 상실했으므로 이제는 다만 죄를 짓는 쪽으로만 자유로왔다.
이렇게 죄를 짓는 속성이 아담으로부터 전 인류에게 상속되었다.
이런 상속에 대한 생각은 두가지 갈래를 가지게 되는데 하나는 유전설이고 하나는 창조설이다. 유전설이란 인간의 신체적 특징이 유전되는 것처럼 죄성도 유전된다는 것이다. 창조설은 하나님이 각 개인의 영혼을 직접적으로 창조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창조설 안에서는 죄의 상속을 말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워 진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평생동안 각 장면에서 둘 중의 하나를 강조하게 된다.
원죄의 결과 인간들은 저주의 덩어리로 전락했으며 사망과 무지와 현세욕에 얽매이게 되었다.
현세욕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지고하신 하나님을 관조하는 데서 멀어져서 저급하고 일시적인 실재들을 관조하게 된다.
이런 현세욕은 성적인 관계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어거스틴의 죄 개념에 대응한 것이 그의 은혜개념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신이 우리를 선택한 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되게 하기 위해서다. 신이 어떤 인간을 선택하고 어떤 인간을 멸하느냐 하는 그 까닭은 인간에게는 없다. 일하고 있는 분이 단지 신뿐이다. 신이 결단하고, 신이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행동에 의해서 가능할 뿐이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타락한 인간은 은혜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런 선도 행할 수 없다.
현재적 상태에서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은혜가 인간안에서 역사하여야 한다.
어거스틴은 “ 하나님은 우리들의 밖에서 활동하셔서 우리의 의지가 움직이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하게 되고 의지대로 움직이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와 협동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경건한 선행도 할 수 없으며 우리의 의지가 움직인다거나 아니면 우리의 의지가 움직일 때 하나님이 협동하게 하실 수도 없게 된다.”고 말한다.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은혜가 일단 의지에 주어지면 의지가 은혜를 배격한다고 생각할 수 조차 없다. 은혜와 의지는 서로 배격하는 것인가 ? 그렇지 않다. 은혜는 의지를 증진시키고 강하게 자극해서 의지 자체가 강요없이 선을 행하도록 만든다.
은혜를 우리를 죄에서 건져서 의지를 주시는 것 뿐 아니라, 견인의 선물을 받아야 된다. 견인 역시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의 활동이다.
은혜는 곧 바로 예정을 말하게 해 준다.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전지성이나 전능성등을 사색해서 나온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구원론적이고 실존적인 사고에서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임을 강조하려는 시도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인간을 결정해 두셨다. 그러나 죄를 짓도록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계속 죄를 짓는 자는 저주 받는 무리 속에 속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어거스틴은 은혜란 하나님의 능력 혹은 유동적 흐름으로 인간안에 주입되는 어떤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은혜란 하나님쪽에서 취하시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안에서 활동하시는 양식으로 보았다.
4.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은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성례전을 통해서 인간에게 온다.
어거스틴은 교회론과 관련된 몇가지 용어를 정리한다.
그는 교회의 보편성은 근본적으로 온 지구상에 퍼져 있는 사실이라고 했다. 통일성이란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사랑의 줄이다.
따라서 사랑이 없는 곳에는 통일도 없다. 역으로 통일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그래서 교회도 없다.
교회의 사도성은 감독들의 사도적 계승에 근거한다. 로마의 감독은 이러한 계승의 축약으로서 전 교회의 유형인 베드로로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계승되어 왔다.
교회의 거룩성은 모든 신도가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의 끝에 가서 거룩성을 완성시킨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상위에서 어거스틴은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별한다.
어거스틴이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보통 지상적인 제도 혹은 혼합된 몸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교회 안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불러 모으신다. 여기에 속하지 않는 자들은 구원받을 자라고 말 할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상적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선택된 몸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서 선택된 자들은 신앙의 활력을 갖는다.
어거스틴은 성례라는 명칭을 각종 의식과 행위에 거침없이 사용하기는 하지만 특히 성만찬과 세례를 일컬어서 사용한다.
세례에는 거룩한 삼위일체, 세례를 받는 사람, 세례를 집전하는 사람이 개입한다. 이 가운데세 첫 두 요소는 필수적인 것이지만 세 번째 요소인 세례를 집전하는 사람의 경우 이 의식의 효력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죄를 씻어 주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례의 효력은 성례를 베푸는 공동체에 의존한다.
어거스틴의 성체성사론은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이런 다양한 해석은 이것을 다양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짧은 리포트를 쓰면서 후스토 곤잘레스의 이해를 따라서 어거스틴의 사상을 정리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의 겉면을 핧았을 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이 출발점이 되어서 지금까지 논의되고, 이용되고 있는 생각이 많음을 보고 놀랍다.
어쩌면 평생을 들여서 공부한다 해도 그의 사상의 전면을 다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당시의 가장 보편적인 사상을 활용하면서 당대의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성경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본받아서 신학함에 애써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