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와 로마카톨릭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지점에 교황이 있다.
전 세계교회의 가장 높은 곳에 로마교회가 자리잡고 있으며, 모든 교회는 로마교회의 결정과 권위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
말씀을 해석하고 말씀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가 교황에게 있다는 생각은 어떻게 가능한가 ? 한 인간에 불과한 교황이 무오하다는 생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정말 비 성경적으로 보이는 교황을 둘러싼 교리들이 어떻게 로마카톨릭의 중요 교리가 되고 계속 지켜져 올 수 있었는가 ?
여기서는 그 형성 과정을 살펴 보고자 한다.
그 중심적인 인물은 “대 레오 1세”라는 칭호를 받았던 레오1세이다.
그러나 그 전부터 여러 가지로 로마교회의 우월성이 주장되었다.
주로 어떤 주장들이 있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교황권이 확정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레오1세 이전의 주장들
로마교회의 우월성이 처음 알려진 것은 AD95년에 기록된 로마의 클레멘트의 편지에서이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보낸 편지에서 로마교회가 고린도 교회에 일종의 책임을 느끼고 있음을 통해 이것을 볼수 있다.
그 후 2세기 말엽에 이르러 이레니우스가 로마교회는 “ 가장 위대한 우주적으로 알려진 교회” 라고 칭할 만큼 로마교회가 부상하였다.
로마 교회가 이렇게 부상하게 된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가장 중심적인 이유는 영광스런 사도 베드로와 바울에 의해 로마에 세워지고 조직된 교회로서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교회라는 것이다.
로마교회의 권위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은 로마의 감독 줄리우스가 341년에 있었던 안디옥 회의에서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의 복권을 촉구하는 서신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이들의 회복을 촉구하면서 “나는 그대에게 축복된 사도 베드로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을 알리고 있노라 ”는 말로 자신의 권위의 우월성을 피력하고 있다.
343년에 있었던 세르디카회의는 사도베드로에 근거하여 로마교회의 우월권을 주장하는 로마의 감독 줄리우스의 주장에 동의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로마의 감독은 가장 축복된 감독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로마교구를 다른 교구의 상급법원으로 지정하여 로마교구의 우월성을 합법화 시켜 주었다. 고울이나 스페인 지방의 감독들이 문제가 있을 경우 자신들의 대감독들에게 문제의 자문을 구하기 보다 직접 로마 감독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 상례였다.
다마수스 감독은 다른 교구의 감독들이 자문을 구하기 위해 보내오는 편지들을 마치 황제가 지방장관들의 서신들을 다루듯이 가볍게 다루었다.
다마수스는 마태복음 16장의 17-19절을 근거로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자신만이 베드로의 역사를 계승한 유일한 감독이라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점점 로마교회는 사법적인 권한마저 갖게 되었고, 로마교회가 모든 교구의 대표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이런 움직임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는 종교적 지역구분은 단순히 세속 정부가 구분한 경계를 따르도록 결의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서 콘스탄티노플이 새로운 로마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곳의 감독이 로마의 감독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닌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콘트탄티노플의 감독은 콘스탄티노플이 새 로마이기 때문에 로마의 감독 다음의 영예를 갖는다.”고 명문화했다.
이런 결정에 대해서 다마수스는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레오1세에 의한 교황권 강화
레오 1 세는 자신의 재임기간동안 로마교회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파문당하기전에 유티케스는 로마교황에게 자신의 지지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고, 파문당한 후에도 계속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또 얼마후 플라비안과 파문당한 자들이 레오에게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 감독이 도움을 청하며 로마교황의 발밑에 꿇어 앉은 것이다.
더 큰 성과는 칼케돈에서였다. 레오는 칼케돈에 아주 강력한 사절단을 파견하였고, 그의 서한은 전 교회의 공식적인 신조의 기초로 채택되었다. 이런 일은 최초의 일이었다.
또한 레오의 사절단은 회의 과정에서도 교황의 의견이 최고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도록 회의를 조정해 나갔다. 결국 레오의 사절단은 칼케돈 세계종교회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은 후에 많은 사람들의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
“ 그것은 교부들의 신앙, 사도들의 신앙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믿는다. 정통은 그렇게 믿을지어다. 달리 믿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 지어다. 레오를 통해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다. 사도들이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레오1세가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다.
28조에서는 새로마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다음의 서열이긴 하지만 로마와 동등한 권한을 가진다고 명문화 했다.
그러나 이런 결정에도 불구하고 레오는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한 역사적 이상의 의미로서 자기가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믿고 있었다. 그가 설교하거나 편지를 쓸때에 이는 바로 베드로 자신이 말하고 글 쓰는 것으로 믿었으며 최소한 그의 말과 그를 듣고 읽는 이들은 이러한 태도를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교황은 성 베드로가 소유했던 모든 것의 합법적 계승자이므로 그가 가진 천국에의 열쇠의 권한의 정도도 약화되지 않았다고 믿었다.
440년대 중반 레오는 사도적 보좌감독인 아프리카 감독 선거의 적법여부를 가리기 위해 교황의 전권을 위임받은 사절단을 아프리카에 파견하였다.
레오는 자기에게 전달되는 보고에 따라 지시를 한다. 결국 아프리카 종교회의에서 다루어진 모든 문제들의 결과를 레오에게 보고하도록 명령한다. 교황은 마치 아프리카 교구가 옛날부터 자기의 관할 아래 있었던 것처럼 아프리카를 다루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레오는 전임자들이 시작해 놓은 일을 완성했다. 레오는 명실상부한 초대 교황이 되었다.
레오의 영향력으로 로마교회는 다른 교구들을 지배하는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교황제도가 표면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레오 이후 영향력 있는 교황은 겔라시우스1세였다. 겔라시우스는 세속의 최고의 권한자는 황제이고 교회의 최고 권한자는 교황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세속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황제가 해결의 열쇠를 가지듯이 교회안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해결의 열쇠가 당연히 교회의 교황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교황의 권위는 중세교회를 통해서 강화되었다.
종교개혁이후 교황의 권위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 되었다.
로마카톨릭 내부에서도 이런 논란이 있었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교황의 권위가 강조되었다.
1870년 교의헌장에서는 교황에게, 첫째로 교회의 그 밖의 모든 힘에 관한 절대적인 통치권을 부여했다. 교황에게 종속되지 않는 사법상의 권한을 가진 기관은 그 어느 것도 교회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로 교황은 보편적인 사교라고 선언되었다.
셋째로 교황이 교황의 자리에서 말할 경우 교황은 무오하다고 선언되었다.
여기서 교황무오설이 선언되었다.
교황무오성이란 교황의 모든 발언이 무오하다는 것이 아니다
교황의 자리에서 나온 선언만이 무오하다는 것이다.
이 선언으로 말미암아 로마카톨릭과 개신교는 접근 불가능하게 되었다.
프란시스 쉐퍼는 교회의 표지를 사랑과 진리의 실천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일치와 연합을 가져오는 것이고, 진리는 그 연합과 일치의 기준이라고 말한다.
일면 로마카톨릭은 일치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기초는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
반면에 개신교는 진리위에 서 있지만 일치를 이루는 사랑이 부족하다.
쉐퍼가 이것이 20세기말 교회의 과제라고 했지만 21세를 보내는 우리 교회의 과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교황제도는 로마카톨릭과 개신교의 연합이나 대화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이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어떻게 형성되어서 지금에 왔는지를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 대화하고 세계의 복음화의 과업에 함께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참고도서
쿠어트 알란트 . 인물로 본 초대교회사 . 엠마오
박용규 . 초대 교회사 . 총신대학출판부
헤넬 역음 . 폴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 한국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