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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름으로” 를 읽고

기독교 관련책 읽기

by 거룩한나그네 2011. 3. 3.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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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는 약간 의아했다. ‘이 책이 리더십에 대한 책이라고 ?’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역을 하면서 점점 더 깊이 헨리 나우웬의 통찰이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한 부분을 예리하게 보여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세 가지가 직조해서 하나의 그림을 드러낸다. 하나는 예수님이 시험 당하시는 이야기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다시 부르시는 이야기다. 그리고 여기에 하바드 대학에서 데이 브레이크라는 공동체로 가게 된 헨리 나우웬 자신의 이야기를 함께 엮고 있다. 이 세 가지를 재료로 그린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리더십이다. 


1. 현실지향에서 기도로

예수님께 닥쳤던 첫 번째 시험은 현실에 충실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돌을 빵으로 변화 시키는 지극히 현실 지향적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말씀선포라는 자신의 사역을 고수하시며 이것을 이기셨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경험하는 가장 큰 고통은 자존감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이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점점 더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들 뿐 아니라 우리시대의 모든 위대한 성취 이면에는 절망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효율성과 제어력이 아주 중요한 열망의 대상이 되어 있지만 반면에 고독감, 소외감, 우정과 친밀감의 결핍, 깨어진 관계, 권태감, 공허감, 우울감 자신을 무용지물로 깊이 자학하는 감정등이 성공 지향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사랑받기 바라는 마음( 실예로 최근에 나온 CCM인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곡은 신자뿐 아니라 불신자들도 좋아해서 핸드폰 벨소리부분에서 일등을 했다 )과 나는 부적절하다는 느낌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만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크리스천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미래의 리더십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서, 모든 화려해 보이는 성공 뒤에 가려진 고통을 깊이 이해하고 그곳에 예수의 빛을 비춰주는 그런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예를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목자가 될 것을 명령하시기 전에 세 번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사역의 가장 핵심 된 질문으로 이 질문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적절하지 못하면서도 진정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는 예수로 성육신 하신 곧 육신의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두움이 없는 하나님의 제1의 사랑이 구체화된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제2의 사랑입니다. 제2의 사랑은 제1의 사랑의 깨어진 모습일 뿐이며 하나님은 그 안에 아무런 어두움이 없는 제1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과 마음에 대한 지식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어디를 가든지 치유,화해,새로운 삶과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는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현신에 적절하려는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제1의 사랑을 아는 지식 안에 거하려면 신비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신비주의자란 하나님의 제1의 사랑 안에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미래의 크리스천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훈련은 바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계속 물으시는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하는 훈련일 것입니다. 이것은 묵상 훈련일 것입니다. 묵상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긴급한 문제들만 쫓아다니는 것으로부터 또 하나님의 마음이나 자신의 마음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미래 리더십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유명세에서 목회로

일반적으로 목회란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회자는 훈련이 잘되고 체계화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두 번째 유혹에 넘어 간다. 예수님이 받았던 두 번째 유혹은 정확하게 뭔가 굉장한, 그에게 열렬한 환호를 안겨다 줄 그런 일을 해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들은 개인주의의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개인주의는 스타의식을 부추깁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신하신 후에 예수님은 그에게 목회의 사명을 주십니다. 이 시대 문화 통념상 우리는 이 말을 베드로가 영웅적인 사명을 행하도록 보냄을 받은 것처럼 매우 개인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목회란 공동체적이며 상호 보완적 경험인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함께’ 보내십니다. 예수님은 교회에서 ‘함께’ 하도록 하셨습니다. 혼자 있을 때 예수님께 진심으로 신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함께 기도하고, 당면한 영적인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며,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늘 순수하도록 나를 도전하는 형제자매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함께’ 사역을 할 때에는 언제든지 우리가 우리들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더욱 쉽게 인식 시킬 수 있습니다. 목회는 공동체적 경험 일 뿐만 아니라 상호관계의 경험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 우리가 인도해야 할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치료하는 자도 아니요, 화해자도 아니요, 생명을 주는 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돌보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요, 깨어지고 연약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제한적이고 매우 조건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여는 한 통로가 되도록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 데 바로 목회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목회는 반드시 상호보완적이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조작하거나 권위주의와 독재적 특성을 보이게 됩니다. 

미래의 지도자가 개인적 영웅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고백과 용서의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기꺼이 고백하고 그들이 목회하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고백과 용서는 죄인 된 우리 인간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한 형태입니다. 이런 훈련이 부족할 때 너무나도 쉽게 세상 정욕에 무너지는 사람들이 바로 헌신된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육신의 진리를 어떻게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의 고백과 용서는 형식적 영성화와 세상 정욕을 피하고 진정한 성육신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훈련입니다. 죄의 고백을 통하여 어둠의 세력들이 육적인 고립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로 들어와 공동체에서 드러납니다. 죄의 고백을 통하여 어둠의 세력들이 무장 해제되어 축출되면서 육체와 영혼의 새로운 통합이 가능해집니다. 

인도하는 자리에서 인도받는 자리로

예수님이 세 번째 시험은 힘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힘을 복음 선포의 유용한 도구로 간주하려는 유혹이 가장 큰 유혹입니다. 이 유혹이 가장 힘이 센 이유는 사랑이라는 어려운 과제에 대한 손쉬운 대체물을 힘이 제공하기 때문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하나님 되는 것이 더 쉽고, 사람들을 사랑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컨트롤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교회역사중 가장 고통스러운 역사는 때때로 사랑 대신에 힘을, 십자가 대신에 지배력을, 인도받기 보다 인도하려는 유혹을 받아 온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베드로에게 목자가 되라는 명령을 주신 직후에 예수님은 섬기는 지도자는 자신이 모르는 또 바라지도 않는 고통스러운 곳으로 이끌려 가는 지도자라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로 도전을 하십니다. 지도자의 길은 십자가에서 끝나는 하향적인 길입니다.(헨리 나우웬은 그의 다른 책인 ‘사람의 길, 그리스도의 길’이라는 책에서 이 시험받으시는 장면을 묵상하면서 사람들의 길은 상향성의 길이고, 예수님의 길은 하향성의 길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의 크리스천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힘과 지배력의 리더십이 아니라 무력과 겸손의 리더십이며, 그 속에서 고통 받는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십니다. 이런 리더십은 사랑 때문에 힘의 사용을 계속적으로 포기하는 그런 리더십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사랑해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분을 따를 준비가 되었으며,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써 생명을 찾고 또 풍성히 찾을 것이라고 언제나 믿는 그런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이것은 헨리 나우웬 자신의 경험에서 빛을 발한다. 그의 책 ‘ 새벽으로 가는 길’에서 헨리 나우웬은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하바드에서 새벽이라는 공동체로 가기까지의 내면의 여정을 보여준다. 고통과 어려움 속에 예수님의 따르는 삶을 잘 보여준다.) 매래의 지도자는 가난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난은 우리에게 참 지도력을 발휘할 가능성을 제공해 줍니다. 

이런 지도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신학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묵회자들이 진정한 신학을 하기보다 심리학이나 사회학적인 바탕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지도자는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신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신학적으로 성찰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일상의 고통과 기쁨의 현신들을 깊이 생각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하나님의 부드러운 인도하심을 아는 데까지 끌어올려 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평가

헨리 나우웬이 리더십이 힘을 가지는 이유는 그의 삶과 행동이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던 자리인 하바드의 교수자리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뿐 아니라 너무나 낯선 자리로 옮겨가는 그의 순종의 삶을 통해서, 또한 장애인과 함께 사역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나우웬은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우웬의 말은 능력을 동반하고 나에게 다가온다.

나우웬이 예수님의 시험 당하시는 장면을 묵상하면서 오늘날의 목회자들이 당면한 상황을 묘사할 때 섬뜩할 정도로 예리한 통찰력을 보게 된다. 이런 통찰과 대안으로서의 기독교 리더십에 대한 또 다른 목소리가 유진 피터슨에서 동일하게 울려난다. 유진 피터슨은 ‘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 ’ 는 책에서 불필요한 존재로서의 목회자를 말한다. 현실적인 필요와 요구에 대해서 적합하고 필요한 존재가 되려는 유혹을 극복하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과 요구에만 적합해지기를 결심하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현실의 유혹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는 안 될 것 같다. 나우웬이나 유진 피터슨의 분석을 앞에 두고 얼마나 유혹이 심한지를 늘 생각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이겨 나가야 하겠다.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처방으로 베드로의 이야기를 하는 데 이 부분도 참 대단하다고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두 번째 이야기인 목회는 공동체성과 상호보완적이어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멈칫하게 된다. 이런 처방이 옳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지에는 자신이 없다. 상하관계가 너무나 분명한 동양 문화 속에서 이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 보았던 것은 우리가 흔히 배우는 목회의 방법론과 여기서 이야기하는 리더십이 상충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배우는 설교, 교회에서의 목사의 주도성, .. 등등은 여기서 제시하는 리더십을 실현시키려면 이런 방법론들도 변화시켜야 한다. 실제로 헨리 나우웬은 공동체라는 상황에서 이런 리더십과 방법론이 일치하게 된다. 그러나 공동체가 무너져 있는 오늘날의 교회에서 어떻게 이런 리더십을 가지고 목회현장에서 살수 있을까 ? 두가지 길이 보인다. 하나는 헨리 나우웬의 이야기는 좋지만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일축하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그의 예언자적 목소리의 울림이 너무나 크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길은 교회 공동체를 이런 리더십이 가능한 공동체로서의 환경을 만들고, 또한 이런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들을 개발해야 한다. 예를 들면 헨리 나우웬이 다른 책에서 보여준 이야기와 묵상이 바탕이 되는 설교 그리고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로서의 목회자가 아니라 동반자와 친구로서의 목회자로의 삶등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현재 한국의 어느 신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안다. 그러면 이 큰 갭을 어떻게 메워야 할 것인가 ?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했던 것은 이 책의 리더십이 윤리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전히 명쾌하지는 않다. 그냥 좋은 책이니까 읽고 생각하라는 의도인가 ? 아니면 무엇일까 ? 하나의 생각은 기독교 윤리는 신명윤리임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것과 그것을 듣고 행하는 일에 기초를이 책이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현실에 뿌리 박혀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흔히 지나치는 현실들이 얼마나 우리를 말씀대로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기 위한 기초를 놓아주고 있다. 이런 면에서는 윤리학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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