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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주석을 읽고

기독교 관련책 읽기

by 거룩한나그네 2011. 3. 3.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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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주석 : R.P.마틴. 빌립보서. 기독교문서선교회.(틴델주석시리즈 11권)


주석을 읽고 보고서는 쓰는 일은 처음이라 어려웠다. 내가 가진 실력과 소견으로 몇 년간 애써서 만든 주석을 평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새롭게 깨달은 것들과 주석을 읽으면서 감동했던 것들을 중심으로 보고서를 쓴다.


1. 빌립보서는 어디에서 쓰였는가?

몇 몇 주석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총론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나의 단견으로는 언제 어디에서 빌립보서를 썼느냐 하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런 증거들이 모여서 누가 이 편지를 썼느냐를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이 논의하는 듯 하다. 이런 논의의 필요성은 교회가 믿어 왔던 것들을 의심하는 비평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 이런 비평학적 노력들이 본문에 대해서나 서신서들의 상황에 대해서 밝혀 준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성경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리고 성경 본문에서 보이는 듯한 사소한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다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명백한 증거가 없는 많은 가설들을 세움으로 성경 자체의 메시지를 보기도 전에 오히려 모호하게 만드는 것 같다. 


2.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이다. 그러나 바울의 상황만을 생각하면 기쁨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감옥에 갇혔고, 어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바울을 반대하고, 방해한다. 또 그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에는 불협화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들 속에서 바울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고 초청한다. 우리까지 기쁨의 자리로 초대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기쁨이 가능했을까? ‘무엇보다 그는 일차적으로 이 일들 안에서 기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주안에서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기쁨은 그 마음과 삶에 그리스도가 충만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상태는 기도해야 할 제목이다.


3. 저자는 빌립보서를 대표하는 말 두 가지를 “코이노니아”와 “복음”이라고 말한다. 

이중 코이노니아는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 중심임에 분명하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과 나눈 코이노니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교제를 증진 시키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저자는 코이노니아를 ‘어떤 사람과 함께 어떤 것 안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서로 공통적으로 소유하는 것 안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참여하는 객관적인 것을 1:5절에서는 복음에, 2:1절에서는 성령에, 3:10절에는 고난에 코이노니아 한다고 말한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우리의 코이노니아를 보게 된다. 빌립보 교인들과 바울이 누렸던 코이노니아에 비해서 너무 수준미달임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1:5절의 “복음에서 교제함”을 주석하면서,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복음에 대해 고백한 사랑의 표는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바치기로 준비된 희생의 정도이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구주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 내 자신에게 묻게 되는 질문이고, 내가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묻게 되는 질문이다. 또 1장7절을 주석하면서도 코이노니아의 실제적인 모습을 말하고 있다.‘동료 의식의 친밀함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공동적인 코이노이아(참여)와 사도와 그 교회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지는 깊은 하나됨의 의식 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동료 의식, 하나 됨, 이런 말들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은혜를 베푸시도록 기도한다. 우리를 하나로 묶으신 성령께서 그 하나 됨을 온전히 체험하게 해 주시도록.


4. 1장 9절의 주석에서는 총명이라는 말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다.

‘총명이라는 원어는 지각, 판별 또는 재치라는 뜻이 있다. 총명은 사람으로 도덕적 결단을 내릴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의 기도에서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라고 말하는 이유는 ‘ 이 두가지 기독교적 특질은 불일치와 헐뜯음의 경향이 있어 바로 교정되어야 할 공동체에서는 필요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권면과 조정으로 나아가기 전에 이러한 간절한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값있는 과목을 배우는데 느린 것 같다. 이 과목이란 다른 사람을 감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며, 책망과 조정의 말을 해야 한다면 먼저 기도한 다음에 사랑으로 말하라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가 해야 할 일중에 하나는 책망과 조정의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과 지식과 총명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바로 잡기 위해서 하는 책망을 잘 못하는 편이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 될 때가 많다. 그리고 크게는 그 사람에게 결국 좋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태도와 삶의 모습을 배워야 겠다. 그리고 항상 내 자신을 위해 이 기도를 잊지 말아야 겠다.


5. 1장 21-24절의 주석 :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개인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소망으로’ 편협하게 해석했다. 이 구절들이 ‘변칙적인 어순’으로 기록되었음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런 변칙적인 것들에 대해서 비평학자들은 거의 무조건 ‘편집’이니 ‘삽입’이니 하는 말을 떠올리는 듯 하다. 참 나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구절이 ‘저자의 강한 감정에 기인한다’는 말이 옳다. 이 구절에서 드러나는 ‘바울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그 기쁨의 봉사로 삶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죽는 것은 봉사의 극치일 것이다.’ 이런 신앙을 본 받아 우리 조상들은 신사참배 거부의 길로 달려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강력한 소망, 개인적인 바램보다는 ‘빌립보 교회에 대한 목자적 책임에 종속’한다. 이런 태도에 감동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런 태도로 현실 속에 살기는 어렵다. 나를 중심으로 살도록 훈련받아온 현대인으로서 바울의 이런 태도는 낯설다. 그러나 복종해야 할 진리이다. 그러므로 나의 소망, 나의 방향도 항상 바울 같아야 한다.


6. 2장1절 성령의 무슨 교제에 대한 주석

이 구절은 읽을 때마다 마음에 어떤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이 주석에서는 이 구절이 어려운 것임을 말한다. 해석의 어려움은 “성령의” 라는 소유격 명사가 주격적이냐 목적격적이냐 하는 것이다. 즉 “성령님에 의해 만들어진 교제, 성령님께서 가능하게 해주신 교제”라고 해석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신자가 그를 소유함으로써 일어나는 성령님 안에서의 교제라고 해석해야 하느냐”는 문제다. 이 주석에서는 케제만의 견해를 따라서 이 소유격을 목적격으로 본다. 그래서 ‘성령님 안에 참여함’이 가장 좋은 번역이라고 한다. 이런 해석은 ‘성령님의 은사와 그의 내주하심과 활동에 대한 신자의 의식적인 경험은 사도의 호소의 출발점이다. 그는 신자들이 그들의 마음과 생활로 모든 은혜로운 사역을 하시는 성령님과의 이 코이노니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개인적 경험으로 증명할 수 있는 보편적으로 수납된 진리라고 간주한다.’ 이런 공통적인 경험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한 몸임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의 의도는 ‘모든 당파심과 파벌의식에 대해 애도의 조종을 울리’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성령님안에 참여한 사람들은 서로 싸우거나, 나눌 수 없다. 그러면 내가 당면한 현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교회 안에 있는 다툼, 시기, 모함함 등은 어떻게 된 것일까? 교단이 현재 겪고 있는 서로에 대한 비판, 다툼등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안에 참여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심각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전자인지, 후자인지는 구분하는 것이 우리의 해야 할 일인데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주님 우리에게 사랑과 지식과 지혜를 주십시오.


7. 2장6-7절의 주석 : 

이 구절이 내포하고 있는 깊음은 어떤 주석도 드러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이 주석에서도 ‘본 절은 다양한 견해들을 일으켰기 때문에 한 해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제안되어 온 그럴듯한 많은 견해들을 묵과하는 것은 주제넘게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이 절을 해석할 수 있는 분명한 기초를 놓는다. 이 구절은 구약을 배경으로 해서 읽어야 하며, 이 구절은 아담과의 대조가 암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타락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본체라는 구절을 주석하면서 전통적인 해석을 말한 다음에 ‘이 두 용어(본체,영광)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에 대한 구약성경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가 그 후 타락 때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이런 관점은 예수님을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최근의 교의학적 논의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것은 “자기를 비어”라는 구절에 대한 주석이다. 소위 케노시스라는 말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소개한 다음에, 새로운 견해 한 가지를 소개한다. 그것은 케노시스를 성육신으로 보지 않고, 십자가를 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이사야53:12절을 배경으로 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계속 해서 나오는 8절(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과 연관해서 보면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이런 견해에 대해서 소개할 뿐 평가하지 않고 있다. 저자의 이런 태도는 어느정도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해석이 은혜로울 수는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은 해석이라고 생각 한다.


8. 2장 12절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씀에 대한 오해는 ‘자주 그 문맥에서 잡아 떼어졌고 하나의 신학적 토론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구원이라는 말에 대한 선입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토론이 신학의 일반적인 서술에서 참되고 필요할지라도 그 편지의 이 부분에서는 적절치 않다.’ ‘참된 주석은 개인적인 용어로가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집단적 생활에 관계하여 사용된 구원이라는 말의 정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독자들은 그 교회의 영적 건강이-싸움과 나쁜 감정으로 병들었던- 회복될 때까지 그들의 교회생활을 개혁하고 이 일을 행하는데 집중하라고 격려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어 가라는 말의 본문에서의 의미는 교회의 영적 건강을 회복해 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너무 쉽게 문맥과 상관없이 해석해 왔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문맥의 중요성을 생각한다. 문맥을 벗어나지 않고, 문맥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직 훈련이 잘 안된 것 같다. 


9. 2장 21절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들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바울이 비난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저자는 세 가지의 가능성을 말한다. 첫째는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는 현재 바울 자신의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말이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전면적인 비평이 아니고 어떤 은사를 필요로 했던 직무를 감당할 자가 없다는 애석한 사실적인 진술이 된다. 셋째는 이 문장이 삽입구라는 것이다. 바울의 주위에 있는 세상의 상태에 대한 삽입구적인 일반적 언급이라는 것이다.이 주석을 읽기 전에는 첫 번째 의미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런 세 가지 가능성중에서는 오히려 세 번째의미가 더욱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울은 디모데를 칭찬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10. 3장2절의 손 할례에 대한 주석. 

이 부분을 읽으면서 원어를 보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볼 수 있었다.

‘손 할례는 할례의 행위를 가리키지만, 바울은 그 본래의 명칭인 페리토메를 사용하지 않는다. 도리어 비슷한 소리로, 그는 조롱조로 그것을 단지 카타토메(절단) 즉 레위기 21:5에서 금지된 이방인의 행위와 똑같은 육체의 절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뉘앙스는 원어를 통해서만 알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뉘앙스의 차이가 본문의 의미를 다르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문을 본래 기록할 때의 그 맛을 느끼기는 어렵다. 어쩔때는 원어를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해석을 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원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11. 3장 8절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나 쉽게 회심때의 결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의 활기찬 언어와 광범위함은 바울이 여기에서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수년 전 그의 회심의 때의 결정이 아니고 그리스도 밖의 어떤 것을 의지하려는 계속 일어나는 시험에 대한 그의 현재적 선택이다.’ 그러므로 시제는 완료형으로부터 현재형으로 바뀐다.이것이 제자도의 핵심인 듯 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면서 그 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점점 풍성해 질 수록 그 외의 모든 것이 정말 헛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12.3:18,19절에 나타나는 대적들은 누구인가? 

이 주석을 읽기 전에는 이방인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주석에서는 이들이 자칭 그리스도인들이며,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결정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유대주의자라고 생각하면, 이들은 율법을 지키기에만 혈안이 되어서, 율법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핍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말할 것이다.

이들이 이방인이라면 반 율법주의적 경향에 빠졌던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있다. 이들은 은혜의 교리를 빙자하여, 방자함에 빠진 자들이다. 어쩌면 이들 둘 다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석에서는 이들이 빌립보 교회의 대적이기 보다는 바울이 갇힌 곳에서 나타난 현상을 말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말한다. 실제로 빌립보서 전체의 기조로 볼 때 이런 제안이 더 적합해 보인다. 빌립보서는 어떤 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바울에게 베풀어 주었던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주조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적인 문맥에서 볼 때, 바울의 주변에 있었던 유대주의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리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13. 개인적으로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심령에 새겼던 구절이 4장6절이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부분에 대한 주석을 읽으면서 더욱 기도의 무릎을 튼튼히 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에 대한 일종의 무의식적인 모욕이다. ... 기도의 가능성과 실제성은 그 자체로는 복종하기 아주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그 문장의 처음 구절의 근거를 제공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어려움과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로 아뢸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괴로운 염려와 신경 쓰이는 걱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벵겔의 말을 덧붙인다. “ 걱정과 기도는 물과 불보다 더 서로 반대된다.”


이 주석시리즈의 편집장은 이 시리즈의 특징으로 ‘ 신약성경을 교수하고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치게 전문적이거나 별로 도움을 얻을 수 없을 정도로 간략한 극단적인 면을 피한 주석들이 부족하다는 점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차제에 본 주석 씨리즈가 다소나마 그 부족을 메꾸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 바램이다.’고 말한다. 이 주석을 읽으면서 이런 바램이 잘 이루어 졌음을 느낀다. 너무 전문적이지 않으면서도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밝혀주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빌립보서 자체가 어려운 구절이 별로 없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애매하지 않게, 정확한 의미를 밝혀 주고,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길들을 열어주는 면에서는 참 유익한 주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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