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읽으면서 느낀 점
1-1. 나도 교회의 회원권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몇 번 있다. 대개는 교회가 위기를 경험할 때였다. 교회의 실제적인 위기가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진 회원들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떤 실제적인 위기 때문이 아닌데도 영적인 위기를 보고 있다. ‘두 종류의 가견 교회’ ‘변화되지 않은 자들로 인한 ’ 영적인 위기를 보고 있다. 이런 감각은 진리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서 오는 것 같다. 현실의 문제에서 시작하기 보다는 성경이 원래 말하는 교회의 모습과 성도의 모습을 알기에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에드워즈와 같은 감각과 접근태도를 배워가야 할 것이다.
1-2.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원의 자격으로 “가시적 거룩성”을 강조한다. 이것을 교회원의 자격으로 삼는 것은 너무 높은 기준인 것 같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생각했던 가시적 거룩성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99-102페이지의 내용을 보면서는 이것이 너무 높은 기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솔직하게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과연 이런 표준에 도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평생 추구해야 할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훌륭한 목표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가르침은 ‘신앙을 개인적인 것’ 이라고 말한다. ‘신앙은 율법주의적인 것이 아니므로 내면이 중요하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가르침인가? 세속화와 개인화의 무덤파기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에드워즈의 말처럼 내면의 고백은 반드시 가시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목회자는 이런 가시적인 것 중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다. 내 경험을 말씀에 비추어보는 훈련,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귀 기울여 듣고, 이것을 성경을 통해 반추해보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1-3. 곁다리로 하나 더 느낀 것은 “겸허한 질의”가 가지는 세밀함과 방대함이 놀랍다는 것이다. 이 문제 뿐 아니라 어떤 문제이든지 이렇게 세밀하게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청교도들에게 놀라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면에서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2. 토론의 핵심적인 문제 (겸허한 질의의 내용은 따로 요약하지 않음. 논문자체가 잘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2-1. 노샘프턴 교회가 가지고 있던 견해 = 스타다드주의
p 96 '성찬식이 사람을 회심시키는 경향이 있는 은혜의 수단이므로, 혹 비중생자라 할지라도 성찬에 참여하는 중에 회심의 은혜를 받들 수 있다고 보았다.‘
‘중생하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생활에 특별한 하자가 없고, 기독교 교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으면 완전한 교회원권을 얻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
p141 '노샘프턴 교인들은 과연 회심을 꼭 지각되는 방식으로 체험해야만 할 필요가 있는가고 의심했다. 그들은 ①그러한 복음의 교리들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그것에 대한 동의,② 혹은 일반적 은혜의 고백만으로도 충분한 신앙고백이 되며,③ 생활에 관해서는 에드워즈가 명명한 바 “단순한 도덕적 진실성”의 소유자 혹은 특별히 추문을 일으키지 않는 선량한 시민이라는 조건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이것은 현대 교회의 세례 자격 요건에 거의 근접하는 것이었다.)
2-2. 조나단 에드워즈의 견해
p99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에 처음 도착했던 청교도 조상들이 주장했던“가시적 성도다움”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가시적 성도다움이란 가시적 거룩성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가시적 거룩성이란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대한 신앙고백과 그것에 상응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에드워즈의 주장은 먼저 개인적으로 회심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체험에 근거하여 자신의 장래의 삶의 방식에 대한 공적 서약을 하고 그 고백에 부합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성찬 참여 자격의 필수 요건이라는 것이었다.’
가시적 거룩성으로 에드워즈가 강조한 것은 ① p100의 포괄적인 열거. ② 그분에게 마음을 드리는 것, 그리스도 편에 서는 것이다. 그리스도편에 선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분을 더 좋아하는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이며 그분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버리는 것이다. ③ 단순히 도덕적 정직성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소유하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성도다움이다.
p104 ‘에드워즈는 입교의 기준을 낮춤으로 인해 두 종류의 가견 교회가 생겼다고 보았다. “경건의 공개적 고백자들”과 “일반적 미덕만을 고백하는 자들”로 구별되는 상황은 에드워즈가 볼 때 말도 안 되는 부조리였다.’ 바로 이런 부조리를 해결하고자 교회회원 자격을 높이고자 했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하고, 교인들에게 알리고자 한 권의 책을 쓴다.
<가견적 기독교회에 있어 완전한 회원권과 성찬참여 자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들에 대한 겸허한 질의>이다. <겸허한 질의>는 3부와 부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문제제기와 기본적인 개념을 정의한다. 2부에서는 문제 제기에 대해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이유를 11가지 서술한다. 3부에서는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스무 가지 반론들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다. 이것은 크게 네 개의 카테로리로 나누어진다. 부록에서는 이 논쟁과 관련된 다른 사람들의 답변이다.
3.함께 토론해 볼 만한 내용들
3-1. 교회회원 자격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교회회원의 자격을 분명히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지금 현재의 일반적인 추세는 스타다드의 생각보다 더 약화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2. 논문에서 제기되는 질문.
1) 135p 문제는 변화의 정도였다. 과연 어느 정도로 변해야 “크고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가?(기준의 문제) 그리고 이것을 판단자는 결국 목사가 된다. 그런면에서 기준이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
2) 141p 에드워즈가 칭의와 성화를 혼돈한 것이 아닌가? 145p 그는 칭의와 성화가 거의 대부분 겹치는 것으로 이해했다. 반면 현대 교회는 칭의와 성화는 완전히 구별되는 별개의 것으로 본다.
3) (이어지면서 조금 발전된 문제) 문제는 회심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라 할 때 어느 정도의 새로움, 혹은 변화가 있어야 회심된 것으로 볼 것인가 하는 판단 기준에 관련되어 있다. 즉 회심에는 어느 정도의 성화 내지 변화가 내포되어야 하는가?